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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로드무비의 결정판, 고은 작가 화엄경! 오태경,김혜선, 이호재,원미경, 신현준

by 비단왕 2024. 7. 25.

90년대 후반,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서 구입한 영화 화엄경 비디오 테이프

 

화엄경은 1993년 국내서 처음 개봉한 뒤 관객들의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영화였습니다

당시 독일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하여 특별상을 수상했던 그런 영화이기도 했죠

 

고은 원작, 장선우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에는 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선재(오태경)가 구도 여행을 떠나면서 처음 만났던 문수에서부터

마지막 만났던 보현보살까지 약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도둑이었다가 개과천선한 문수, 파계승 이호재, 연꽃여인 원미경, 바람둥이 장꾼 신현준,

눈먼 여인 정수영, 욕쟁이 의사 독고영재, 소년박사 아버지 엄춘배, 어린 소녀 김은미, 요녀 이혜영,

선재 배우자가 된 김혜선, 천문대 소사 박종설, 늙은 등대지기 이대로 등등...

 

처음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를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파계승 법운(이호재)을 만난 후로는 선재(오태경)의 여행 목적이 구도행각으로 변질됩니다

아주 다양한 방면의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길을 묻고 우주의 진리를 묻죠

 

영화 화엄경은 작가 고은이 소설로 썼고 장선우 감독이 1993년, 영화로 제작했습니다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은 부처님 설법 초기에 나온 경전인데요 

당시에는 여러 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하나의 경전으로 통합되어 편찬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면 영화 화엄경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에 대하여

잠시 부대설명을 붙여보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엄(華嚴)의 원래 명칭은 인도의 범어로 잡화(雜華)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즉, 이름 없는 꽃들을 포함한 수많은 종류의 꽃으로 법계를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뜻이죠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꽃이란 중생인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진실의 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엄경의 범어로 된 원본은 지금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하네요

다만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범어로 된 본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화엄경은 어떤 경전이냐?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명쾌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화엄경의 방대함과 난해함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죠

화엄경을 펼쳐 보았을 때 보살의 종류만 해도 수십 수백 개의 보살이 등장하고

또 번복적으로 이어지는 난해한 설법에 그만 책을 덮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화엄사상하면 저 신라시대의 원효와 의상이 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중국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의상은 낙산사와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경을 강론했고요

원효도 화엄은 물론 대승불교에 이어 소승불교까지 두루두루 섭렵하여 설법을 했습니다

 

화엄경 핵심의 가르침은 대략 이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다 꿈과 같고 오온은 모두 다 허깨비와 같다 

여기서 오온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렇게 다섯 가지 현상으로서

형상, 느낌, 생각, 행동, 지식을 말하는데요

삶과 죽음은 꿈이며 이 육체는 덧없는 것임을 확실하게 주시하면

삶과 죽음에 속박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죠 

 

일체 만물은 모두 덧없다 

번성한 것은 반드시 쇠멸한다 

우주만물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이 하나가 전체이며 전체는 곧 하나다 

 

이상 화엄경의 핵심 가르침이었는데요 말로 할 수 없는 내용을 말로 한 번 해 봤습니다

훗날, 어느 누가 와서 이 글을 보고 이 가르침을 이행한다면 필자는 구업을 면하게 될 것이고

또 여기서 귀동냥만 해가지고 여기저기 어영나팔만 불고 다닌다면

필자는 구업을 지은 대가로 펄펄 끓는 유황불속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그러면 다시 소년 선재가 등장하는 화엄경 입법계품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소년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은

화엄경의 가장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에 나오는 내용으로서

보살의 도를 실천하고자 구도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있죠  

입법계품은 화엄경 전체 불량의 4분의 1 정도나 된다고 하는데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의해 보리심을 일으킨 소년 선재가 53명이나 되는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보살도의 실천에 대하여 묻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물론 그 선지식들의 직업이나 생활방식도 아주 다양하죠

보살, 비구, 비구니, 세속의 여신도, 바라문, 이교도, 선인, 신, 왕, 의사,

뱃사공, 부인, 여인, 노예,장사꾼, 소년, 소녀 등등....

이렇게 선지식 가운데 불교도들도 있지만 갖가지 직업을 가진 세속인과

다른 종교의 신도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년 선재는 구도의 길을 떠나면서 도를 묻는 그 상대가 누구이건

인생의 도에 통달한 가르침만 배울 수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나이 든, 신분이든, 종교든 가릴 것 없이 진리를 물었던 것이죠 

 

90년대 후반, 폐업하는 비디오 가게서 구입한 영화 화엄경 비디오 테이프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엄마가 갖난 선재를 길가에 버리고 도망가 버리자 전과가 화려한 도둑님이었던 문수에게 발견되죠

그 후 문수는 개과천선하여 넝마주이로 살면서 갖난 선재를 애지중지 키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수가 사고로 요절하게 되고 선재는 아버지(문수)를 화장할 때 어린 소녀

이련(김은미)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련은 선재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하죠   

하지만 어린 선재는 아직 찾아야 할 엄마가 남아있다면서

엄마가 증표로 준 담요 한 장을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무작정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파계승 법운(이호재)을 만나게 되는데

파계승 법운(이호재)은 선재(오태경)에게 스스로 익혀보라고 피리를 주죠

그때부터 엄마를 찾아 나서던 선재의 여행 행각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여정으로 바뀝니다

 

그 후, 선재는 끝없는 여정 속에서 바람둥이 장꾼 지호(신현준)를 만나게 되고요 

 

 또 세상의 영화를 포기하고 어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욕쟁이 의사 해운(독고영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눈과 성기를 잃고 다리 밑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맹인가수이나(정수영)도 만나게 되고요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다 수십 년째 감옥생활을 하는 장기수 해경도 만나게 되죠

 

그 후, 다리 위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맹인가수 이나(정수영)를 또 찾아오는데요 

이나와 처음 만났을 때 이나는 선재의 피리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선재가 피리를 불 줄 몰랐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피리실력이 늘었죠

그래서 맹인가수이나(정수영)에게 피리소리를 들려주려고 찾아온 겁니다

 

피리의 곡은 선재가 이나를 처음 만났을 때 이나(정수영)에게 들었던 노래였죠 

피리소리를 다 듣고 난 이나(정수영)가 깜짝 놀라 선재에게 뭐라고 한마디 합니다

 

이나:어떻게 그 노래를 한 번 듣고 다 기억하셨어요?

선재 :.................................

이나:하지만 저는 노래를 오래 간직하지 않아요!

선재 :..................................

이나:한 두 번 부르고 버리죠. 한두 번 부르고 버려야 노래라고 할 수 있어요

선재: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이나:흐르는 것을 따르세요! 흐르지 않는 것을 따르지 마세요!

선재:그런데 이나 누나는 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왜 못 잊으세요?

흐르는 것을 따르라면서요?  그럼 잊어야죠!

이나 : 그것도 흘러가겠죠!  언젠가는 흘러가겠죠!

 

이 대목에서 선재와 맹인가수 이나(정수영)의 대화 내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든 많은 재산을 가지고 호의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멈추어 있기를 바라죠.

하지만 삶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도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도 타인들에게 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흘러가라고..... 흐르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그러고는 정작 자신은 흐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있습니다  

지금 이 영화에 나오는 맹인가수 이나(정수영)를 통해 세상 모든 모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애욕을 비웃지 마라! 보살의 씨앗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 지나며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선재는 이련(김혜선)과 다시 만나 동행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 속 선재는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이련이 소녀(김은미) 때 만난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련(김혜선)은 흐르는 세월 속에 처녀가 되어 있었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선재가 늘 아이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과 죽음에 속박되지 않는 화엄경 본래의 상징적 의미가 아닐까요?

 

흐르는 세월 속에 처녀가 다 된 이련(김혜선)과 아직 아이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선재(오태경)는

사랑을 나누고 이때 이련(김혜선)은 선재의 아이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선재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한 곳에 눌러살자는 이련(김혜선)의 간청을 물리치고

천문대로 향하죠. 그리고 그곳에서 선재(오태경)는 또 어린 소년 김박사를 만납니다 

 

여기서 어린 소년 김박사가 등장하는데요

김박사는 아버지(엄춘배)가 생명은 자연이 키운다는 논리로 

아들에게 천문대 별자리 관측을 맡기게 한 거죠.

그리곤 자신(엄춘배)은 아들의 양육도 포기한 채과부의 식당에 빌붙어 삶을 영위합니다  

 

선재는 천문대서 소년 김박사에게 우주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듣죠 

 

그리고 선재는 천문대가 있는 산을 내려와 이련(김혜선)과 함께 있었던 하숙집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하숙집 주인에게서 이련은 죽은 아이를 묻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죠

 

 다시 법운(이호재)을 찾아 부둣가로 온 선재!  

 

선재:스님! 여기서 뭐 하세요?

법운:밥 먹고 살려면 일이라도 해야지!

선재:하필이면 생선 배를 따는......

법운:허어 ~ 그렇게 흘려 다녀도 어째 모르시는가?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닌데 절간에 앉아 삼매에 드나.... 생선 배를 따며 삼매에 드나....

삼매에 들긴 다 한 가지일세!

선재:도대체 스님은 누구신가요?

법운:헛헛헛.... 별 걸 다 물으시는군!  여자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주제에....

보다시피 생선 배 따는 중생일세!

부처님도 중생의 업을 불가사의하다 했거늘.... 자네가 알턱이 있겠는가?

선재 : 전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법운:이련(김혜선)을 따라가시게! 그러려고 날 찾아온 거 아닌가?

선재:전 여자를 따라가지 않아요!

법운:아....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시든가? 먼 별을 보고 왔으니 이제는 가까운 중생을 찾으시게!

 

그리곤 선재(오태경)는 세상 모든 이들이 부처라고 하며 물속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하죠

 

 하지만 늙은 등대지기(이대로)의 도움을 받고 다시 기사회생합니다

 

다시 또 선재의 긴 여행 행로가 계속되던 어느 날 

꿈속에서 만났던 요녀 마니(이혜영)를 현실에서 만나게 되지만 선재는 마니의 유혹을

잠재우고 계속되는 여행길에 지쳐 길에서 쓰러지죠. 이때 꿈속에서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연꽃여인(원미경)을 만나 정성 어린 따뜻한 대접을 받고 꿈에서 깨어납니다

 

진흙탕 속 꿈에서 깨어난 선재(오태경)는 지금까지 겪어왔던 이 모든 실상이

불에 타다 남은 한주먹 재와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어느 겨울날 바람둥이 장꾼 지호(신현준)의 아내가 되어

힘들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이련(김혜선)을 또 어느 겨울 강가에서 만나게 되죠 

 

그때 선재(오태경)는 세상 모두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후기****  

 

선재동자는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경전, 화엄경의 마지막장 입법계품에 나오는 소년인데요 

경전 속의 소년 선재가 만났던 선지식들은 모두 53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이와 똑같이 하려면 우선 53명의 등장인물들이 필요해지겠죠? 

그것도 직업이나 삶의 방식이나 성격이 다 제각각인 53명의 인물들을 출현시키고

또 53명의 인물들을 다 찾아다니며 도를 묻는다면

아마 이 영화 10시간을 상영해도 다 끝을 보지 못할 겁니다. 

이런 이유로 영화 화엄경에서 어린 선재가 만났던 선지식들은 모두 열두세 명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화엄경"은 선재(오태경)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였죠  

당시 11살의 어린 나이로 이런 어려운 영화를 소화시키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이런 우려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어려운 장면들을 잘 소화를 해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감옥에서 수십 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는 장기수, 해경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소를 훔쳐 타고 가다가 소 주인에게 걸려 감옥으로 가서 해경을 만나는 장면이나

슬픈 노래를 부르는 맹인가수 이나가 "흐르는 것을 따르세요! 흐르지 않은 것은 따르지 마세요!"

했을 때, "이나 누나는 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왜 못 잊으세요?

흐르는 것을 따르라면서요?  그럼 잊어야죠!"

라고 반문하는 장면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뇌리에 확연히 남아있는 명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화엄경을 펼쳤을 때 그 방대함과 난해함에 공부깨나 했다는 성인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렇게 어려운 내용의 연기를 11살 소년이 자연스럽게 해 냈다는데 대해 찬사를 안 보낼 수가 없군요 

 

흥행면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임권택 감독 강수연 주연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영화에 미치지 못하지만

우주의 진리라는 불교관을 놓고 봤을 땐

그 내용면에 있어 "화엄경" 이 더 충실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고은 원작, 장선우 감독 화엄경 

배경음악:김영동 - 침묵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