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시내에서 동해 해변길을 따라 울진 방향으로 약 40Km 달리다 보면
임원항과 원덕읍이 나오는데 원덕읍 호산리에서 장이 서는 거야
삼척 원덕읍 호산리는 울진군과 경계지역이기 때문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여기가 삼척인지 아니면 울진인지 헷갈리더군
여하튼 원덕읍 호산리는 삼척 시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네,,,
호산리에 들어서니 마침 장이 서고 있었어
참고로 삼척 5일장 원덕읍 호산 장날은 끝자리가 5일, 10일,,,
삼척 5일장 원덕 호산 장날
90년대 중반쯤 됐을까?
삼척 가곡면 오저리 치바우에 살던 화전민들도 여기 호산장에 들려서 생필품을 사곤 했었지
그들은 태백 시장보다도 삼척 5일장 원덕 호산장날을 간 거야
그리고 시내버스를 타고 가곡천변에 내려서
산꼭대기 화전민촌까지 2시간을 걸어서 올라가곤 했었지
그래서 그런지 이 시장에만 오면 옛 추억이 아련한 거 있지?
삼척 오일장 원덕 호산 장날, 호산 수산물 시장
원덕 호산 시장에서 아침 해장으로 국밥 한 그릇씩 먹고 길을 나섰어
임원에서 울진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호산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지
그리고 가곡천을 따라 태백으로 가던 도중, 가곡면 소재지를 지나는데
2차선 도로변에 "오목리"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거야
그 표지판을 무심코 지나치는데 그때 반짝 떠오르는 곳이 있었어
오목리라..... 오목리라....
오목리라면 첩첩산 꼭대기에 있는 화전민 마을인데....?
그 "오목리"라는 표지판이 왜? 거기에 서 있는 거지?
그렇다면 그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오목리가 나온다는 얘기 아닌가?
그 산꼭대기 마을 이름은 오목리 치바우였고
내가 20여 년 전에 수차례 올라가 보았던 곳이었지
그때 나는 가곡면 소재지 적당한 곳에서 차를 확 돌려 버렸어
그리고 그 "오목리" 표지판이 가르쳐 주는 데로 차를 몰았지
깊은 골짜기의 비좁은 계곡길을 따라 자동차로 한 4~5Km쯤 달려왔나?
산 중턱에 오목리 시내버스정류소가 보였는데 그 정류소는 버스 종점이었어
일단 버스정류소 앞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형세를 살펴보는데
자동차 길은 여기서 그만 끊어져 버린 거야
그때 옆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던 아산 아저씨가
눈을 부스스 뜨고는 깜짝 놀라 머라고 했어
"어? 여기가 어디여?"
"나도 몰라! 막 가다 보니까 자동차 길이 끊어져 버렸네"
어떻게 여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영문도 모르는 아산 아저씨가 그제야 차에서 내렸지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어
"야아 ~ 여기가 어딘지 몰라도 조용하니 참 좋네! "
삼척시내에서 이곳 가곡면 오목까지의 거리는 40~50Km, 자동차로 1시간은 꼬박 걸리는 거리였어
같은 삼척인데도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리는 이유는 삼척땅이 워낙 넓기 때문이지
태백이라는 탄광도시가 탄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태백은 삼척에 속했었어
그래서 강원도지사 할래? 삼척군수 할래?..... 하고 물어오면
삼척 군수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하더구먼....
그런 삼척이 이제 2020년도에는 인구 20만을 목표로 세웠지
오목리 시내버스 종점 앞에서 이렇게 자동차 길은 끊어져 있었어
산꼭대기 화전민 마을 치바우에 올라가려면 여기서 차를 버리고 올라가야 한다는 얘긴데
이곳에서는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
20여 년 전, 오목리 치바우에 올라갈 때는 가곡면 오저리 도로변에 있는 휴양식당 앞에서 올라갔었어
그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파른 산길을 타고 1시간 하고도 20~30분은 더 올라갔었던 거야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고 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하면서 온몸에 기운이 쪼옥 빠지는 것이었지
삼척(三尺)!
삼척(三尺)이라면 한 척, 두척, 세척......... 세척이라는 이야기지
한 척은 한 자라는 이야기고 한 자는 30Cm 아니겠어?
그러니까 석 자는 90Cm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그렇다면 무엇이 90Cm 냐고?
코가 90Cm라는 이야기지
다시 말해 삼척(三尺)은 석자이고 무엇이 석자냐? 하면 코가 석자라는 얘기여
좀 더 확실하게 말을 하자면 내 코가 석자이니 남을 도울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기지
이곳 버스종점 오목리 화전마을 한가운데 서서 내 코도 한 번 만져 봤어
가만히 만져보니 내 코는 석자는 못 돼도 두자쯤은 되어 보이는 것 같았지
원래는 석 삼(三) 자에 오를 척(陟) 자 해서 삼척(三陟)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석 삼(三) 자에 자 척(尺) 자 해서 삼척(三尺)이라 부르고 싶어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너와집과 굴피집들은
모두 삼척(三陟)의 첩첩산중에 다 몰려 있었고 또 그들은 그렇게 척박한 화전을 일구며
고단한 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이런 이유로 삼척에 살았던 사람들은 코가 세척(三尺)이었을 만큼 근근이 살아왔던 것이었어
그러고 보니 삼척(三尺)이나 삼척(三陟)이나 글자만 틀릴 뿐 뜻은 거의 비슷한 것 같구먼....
세 발짝 오르는 것이나, 코가 세척이나.....
이제 코가 석자인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곳에서 또 코가 석자인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산꼭대기 화전민 마을 치바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어
첩첩산 꼭대기 화전민 마을 오목리 치바우 - 1995년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오목리 치바우)
산꼭대기 화전민 마을 치바우까지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산 길을 타고
1시간 하고도 30분은 더 올라가야 하는 험난한 코스였지
그 산 정상에는 5~6 가구의 화전농가들이 척박한 불밭을 일구며 마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어
그곳은 전기불도 없고, 보일러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티브이도 없고, 오디오도 없고,
전자레인지도, 전기밥솥도, 세탁기도, 신문도, 잡지책도 없이
오로지 모든 것을 맨손과 맨 발로 해결하며 원시생활도 돌아가야 했던 곳이었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파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태백산맥 깊은 골짜기뿐이었어
그들은 그 태백의 골짜기만 바라보며 마늘 농사를 짓다가 모두 집을 버리고 삼척시내로 이사를 갔지
밤이 오면 산꼭대기 화전마을은 월색이 가득했는데 이젠 폐허의 서른 회포만이 남아 있었어
첩첩산 꼭대기 화전민 마을 오목리 치바우 - 1995년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오목리 치바우)
산꼭대기 5~6 가구가 마늘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화전마을을 사람들은 치바우라 불렀지
당시는 "설호"라고 하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화전민들이 버리고 간 집을 수리해서
산채를 만들어 살고 있었던 거야
버려진 몇 채의 집에서 쓸만한 재목을 골라내 지붕도 바꾸고 마루도 만들고 마당도 만들고
우물도 만들고 꽃밭도 만들고, 방안 벽지는 한지로 붙여서 그럴듯한 산채를 완성시켰어
산 꼭대기 화전마을 산채 앞마당에 이렇게 연등이 걸려 있는 이유는
이 날이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인 사월 초파일 전날이었기 때문이지
말은 부처님 모신 절간이지만 모양은 화전민들이 버리고 간 오두막을 수리해서 쓰고 있는 산채였어
이곳에 화전농가를 수리해서 살고 있던 스님은 법명이 "설호"라고 하던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은 이곳에 혼자 살면서 사월 초파일이 되면 이렇게 연등을 만들어 마당에 걸어 놓곤 했지
위에 사진 오른쪽으로 빈 폐가가 보이는데
저 폐가가 바로 그 화전민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집이었어
그 집에는 가곡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있었지
우리가 걸어서 1시간 30분을 올라와야 하는 가파른 산 길을
그 아이들은 1시간도 안 걸려서 올라왔어
그 아이들이 살던 화전민 집은 문이 창호지로 되어 있었는데 방에는
칠이 다 벗겨져 나간 낡은 가구도 있었고 부엌에는 두고 간 세간살이도 있었지
바로 그 옆으로는 아이들이 버리고 간 다 낡아빠진 책가방과 일기장도 있었어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지
1992년 6월 XX일
오늘은 학교에서 서울이란 동네를 사진으로 봤다
나는 세상에서 우리 집이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집들은 우리 집 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집을 하늘에다 짓는가 보다
1992년 X월 XX일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물도 캐고 꽃도 따서 머리에 꽂고 놀았다
우리 집 올라가는 길은 옆집에 있는 재향이하고 나 둘 밖에 없다
다른 친구들도 놀러 왔으면 좋겠는데 우리 집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다들 오기 싫어한다
오늘은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너무 많이 놀아서 조금 늦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혼났다
이제 그들은 화전민 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어
어쩌다 이곳에 두고 온 부모의 무덤에 벌초를 할 때 만나면 소식을 듣곤 하지
자신은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 취직을 했고 아이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한다고.....
그런데 시멘트 공장 일이 이곳에서 마늘농사를 짓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거야
이렇게 쉬운 일이 세상에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었어
여기서 마늘 농사를 지어서 수확할 때마다 빈 몸으로 올라도 숨이 찬 이곳을
그들은 지게에다 마늘을 가득 지고 이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렸던 사람들이지
그렇게 단련이 되었던 사람들이었기에 시멘트 공장 일이 쉽다는 말이 나올 법도 했어
이곳에 들어와서 화전민으로 살다가 화전민으로 일생을 마친 그들의 부모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애써 생각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을 것 같았지
지금도 그들 부모의 무덤은 이곳 치바우에 있다는 거야
어쩌다 치바우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던 화전민들을 보면
세상에서 유배를 당한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어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장녹수나, 연산군이나, 대원군이나,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나, 태조 왕건이나
이성계나, 세종대왕 같은 역사 드라마들을 보면 당시의 유배자들은 첩첩산중으로 유배되면서
임금이 계시는 방향으로 철퍼덕 엎드리고는 이런 작별 인사를 하곤 했었지
"전하! 부디 기체일양 만강하옵시고 옥체 편히 보존하옵소서!"
유배당하면서도 임금에 대한 불만은 눈곱만치도 없었어
정말로 대단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지
치바우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사람들도 그런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어
아마 나 같았으면 분명 이런 말 한마디쯤 내뱉었을 거야
"전하! 눈에 백태라도 끼었나이까?"
산꼭대기 치바우 올라가는 길은
사람의 발자취 없고 길도 보이지 않았어
깊은 골짜기 사이로 첩첩산중 끝이 없고
가파른 산길에 잡초는 무성하여 찾는 사람 없었지
돌은 무덕무덕 산은 첩첩한데
이곳에 화전민으로 들어와 화전민으로 살다가
화전민으로 고단한 생을 마친 무덤들이 있었어
잡초 무성한 산 길도 여기 와서 끊기고
주인 잃은 폐가엔 왕거미가 집을 짓는데
가파른 산길 옆에 있는 무덤 하나
잡초 속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잠만 자고 있었지
맨손으로 들어와 불밭을 일구던 화전민들
이제는 흰구름 오가는 길목에 깃들은 거야
무덤 앞에 버려진 횐 고무신 한 짝
살아생전 보고 싶었던 사람 찾아가라고 놓았을까?
아주 오랫동안 갇혀 있던 울음인 듯
치바우에 갇혀 있던 솔바람이 터져 외치나니
나는 이 땅의 산이 되고 물이 되고 바위가 되고 바람이 되어
태백산 골짜기를 유랑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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