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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무인석 없는 조선시대 왕릉! 영월 장릉(단종릉)영월 군수 박충원, 엄흥도 정여각

by 비단왕 2024. 6. 16.

영월읍 중동면 석항리

 

2008년 8월,,,

영월 중동면 녹전리 장터에서 갑작스러운 소낙비를 만나 장터도 못 돌아보고

수라리재를 넘어 석항 삼거리에 들어왔을 때는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목조 슬라브 주택들과 오래된 시멘트 콘크리트 단층집들이 길게 늘어선

석항 삼거리의 스산한 거리를 지날 때쯤에는,

옛날 탄부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탄광촌의 검은 흔적들이 거뭇거뭇 묻어나고 있었다

석항리는 한일합방 이전까지는 정선 땅이었는데,

한일합방 후, 곧바로 영월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한일합방이 1,909년이니까 1910년대 중반쯤의 일이 아닌가 싶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영월의 석항리에 들어와 탄광이나 금광 같은 광산에서

엄청난 광물들을 채굴해서 전쟁물자로 쓰거나, 아니면 본국으로 보내졌을 것이고,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지하 수백 미터나 되는 막정에서 목숨을 담보로 광산 일을 했다고 한다 

이제 나는 이 검게 그을린 영월의 중동면 석항리 마을을 지나,

태백선 철도와 나란히 달려 영월 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 영월읍 영흥리

 

석항에서 수라리재를 넘으니 영월 장릉이 보였다 

오늘은 장릉 부근해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장릉(莊陵)앞에 자리잡고 있는 장릉 휴게소

 

내일은 영월 덕포리 장터에서 장이 서는 날이다

오늘은 이 부근 어디 선술집에서 막걸리라도 한잔해야겠다 

어디 선술집이 있나? 

주변을 살펴보는데 언젠가 한 번쯤 본 듯한 금자네 감자떡집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금자네 감자떡집이라,,,

어디서 봤더라?

아하! 그렇지! 

성은 백이요, 이름은 금자?

그리고 별명은 "아무렴 그렇지" 였었지!

작년 정월달이었던가?

북풍한설 휘몰아치고 있던 그 추운 겨울날,

금자네 감자떡집 주인이 영월의 어느 산 꼭대기에서

홀로 사는 독거노인들을 방문하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할배의 방에는 요가 없었는지 라면박스 깔고, 다 떨어진 거적때기 불을 하나 덮고 있었던

할배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 내내 죽어라고 농사를 지었던 산 꼭대기 배추밭이

수확하나 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눈 속에 파묻여 얼어 죽어 있었다 

그때 그 할배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시커멓게 그을린 냄비에다

김치찌개를 끓여 드시던 그 모습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배추농사는 이천 평이던가? 삼천 평이던가?

넓은 밭에 참 많이도 심어 놓았는데, 그때 배추값이 한 포기에 오백 원에서 삼백 원으로,,,

조금 심한 곳은 이백 원까지 떨어졌었다나?

 

폭설이라도 내리면 완전히 고립되는 영월의 산꼭대기 마을에 홀로 살고 있는 할배로 기억하는데

금자네 감자떡집의 주인이 영월의 오지마을에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봉사 활동을 하던 때였다

여하튼 그때,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그 사진을 나에게 보여 주면서

이십만 원을 송금해 주었다.

그리고는 저기 영월의 금자네 감자떡 집으로 알아서 이불을 이십만 원어치만 보내 달라고 하기에

주소를 물어봤었는데 바로 저위 사진에 보이는 영월의 금자네 감자떡집이었다 

별명이 "아무렴 그렇지"라고 하는,,,

 

금자네 감자떡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전통 찻집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영월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는 날씨였었지만,

입고 있던 인견옷이 짝 달라붙을 정도로 아주 후덥지근한 날이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조금 전에 금자네 감자떡 집에서 샀던 감자떡을 들고,

저기 보이는 전통찻집으로 씨적씨적 들어갔더니, 주인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세요?"

한 번 불렀을 때는 묵묵부답이었고, 조금 목청을 높여 한 번 더 부르니까

웬 할배가 주방 쪽에서 무엇인가를 하다 말고 엉거주첨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멋젓게 웃으면서 거기 앉으라고 자리를 권한다

 

"동동주 있으면 하나 주세요?"

이 말에 할배는 잠시 난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헐헐 ~ 웃으면서 멋젓게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지금요... 동동주 있던 거... 다 떨어졌는데...." 

"밖에 동동주라는 푯말이 붙어 있어 들어왔는데..."

 

내가 대략 난감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더니, 이 할배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작은 눈을 반짝 치켜뜨며 대뜸 한 마디 던진다 

 

"아... 여기 한 병 있기는 있대요!  근디요! 한 병이 안 되는데 어쩐대요? "

"그거라도 그냥 주시고, 뭐 도토리묵은 되쥬?"

 

"도토리묵은 있대요!"

"그럼 그거 한병 먼저 주세요"

 

이렇게 해서 불교 전통찻집이라고 하는 곳에서 막걸리 한 통하고 묵을 시켰다 

그리고 할배와 이야기를 해 봤더니,

오늘은 보살님이 서울에 가서 자기가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웬 보살님이시냐고 물어봤더니 그 보살님은 자신의 할매인데

여기서 신수, 사주, 팔자 같은 것도 봐주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서울에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여기 나와 있는 것은 불사를 하기 위해서지, 장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서

절을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손님들이 주는 대로 돈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도토리묵을 먹다 말고,

그럼 이 도토리묵은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만 원이라고 한다

속으로는 조금 비싼 편이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할배네 벽의 메뉴판에는 동동주 값이나 도토리묵 값이 적혀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고는 그 할배가 좀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봤다

 

"불사를 하기 위해서지, 장사하려고 나온 것은 아니래요!"

그 말을 다시 한번 더 떠올리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따른다고 했거늘,,,"

 

여하튼 저 불교 찻집에서 동동주 한 병하고 도토리묵을 한 접시 시켜 먹고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푸려 있었으며, 좀 전에 잡아 두었던 장릉 모텔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기는 장릉 바로 앞에 있는 장릉 모텔인데, 건물의 모습이 좀 고풍스럽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당했던 것처럼 나도 이곳으로 유배를 온 기분이었다 

내일은 영월 덕포리 장날,,,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지내볼까? 

 

일단 여기다 여장을 풀고 영월 읍내로 나가 중앙시장 한 바퀴 돌아봐야지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영월 읍내로 향했다 

 

영월읍내에 자리잡고있는 자규루(子規樓)

 

자규루(子規樓)는 관풍헌(觀風軒)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약 60~70m 정도인 아주 근접한 거리에 있다

세종 때 영월군수가 창건하여 매죽루라고 하였는데

청령포에서 두 달 정도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이 누각에 올라 자규시를 남겼다고 한다

그 후, 이 자규루는 몇 차례 홍수로 물에 잠겼으나 그때마다 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곳 관풍헌(觀風軒)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날만 저물면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두견새가 슬피 우는 이 누각에 올라,

마치 두견새의 슬픈 울음이 자신의 처해있는 처지와 같아 보여

자규시(子規詩)를 읊었다 해서, 이때부터 자규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종은 한을 달래고자 날이 저물 무렵이면 관풍헌 앞에 있는 이곳 자규루에 자주 올라와

한양 땅이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 읊기도 했다고 한 

물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부인이었던 정순왕후였지 않았을까?

 

관풍헌(觀風軒)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자규루(子規樓)

 

여기 원통한 심사로 읊었던 단종의 자규시 한편을 그대로 옮겨본다

 

一自怨禽出帝宮     천고 원한 가슴 품고 나온 이 몸이

孤身雙影碧山中     깊은 산중 외로운 신세 처량하구나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잠 빌어도 잠 오지 않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해는 가고 사름은 가지 않네

聲斷曉芩殘月白     새벽에 우는 두견이 시름 적시고

血流春谷落花紅     봄 계곡 지는 꽃 내 눈물 뿌렸다오

天聾尙未聞哀訴     애끊는 이 사연을 하늘은 왜 못 듣고

何奈愁人耳獨聽     한 많은 사람들만 귀 밝으니 웬일인고

 

- 이상 영월군 홈페이지에서 빌려온 단종 자규시 번역본 -

 

그런데 성삼문과 동문 수학한 신숙주 이놈은

단종비 정순왕후를 자기 달라고 세조에게 간청을 했다지? 

단종비, 정순왕후를 달라고 간청하다니? 

이놈이 피맛을 보더니 이제 점점 미쳐갔던 거지 

한명회보다 더 비열하고 치졸한 인간은 신숙주 

 

당시 역모의 집안 여인들은 공신들에게 첩이나 노비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종이 역모를 꾀했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수양대군 세조가 역모를 꾀했다는 건가? 

당시 역모를 꾀했던 놈들은 수양대군 세조와

충신들의 여인들을 잡아다 첩이나 노비로 끌어갔던 바로 이놈들이지 

 

낮은 담벼락 아래로 살짝 보이는 장릉(莊陵) 경내 풍경

 

장릉 앞, 장릉모텔에서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장릉 경내에 들어가려고 매표소로 가보았으나

너무 이른 시간인지 아직 표를 팔고 있지 않았으며 들어가는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굳게 쳐져 있었다

그때 시간이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 않나 싶다

하는 수 없이 장릉 관리인들이 나올 때만 기다리며 담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살짝 엿보고 있는데

마침 굳게 닫혀있던 정문의 철재 바리케이드가 열리고 있었다

이제 장릉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가 보다 싶어 매표소로 가보니 

매표소 직원이 이제 막 창구를 열어놓고 손님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200원을 주고 입장권을 끊어 장릉 경내에 입장했는데

이날은 내가 가장 먼저 입장한 첫 손님이었다

 

아무도 없는 장릉 경내에 입장하고 보니 어디부터 갈 것인가 망설여졌다 

단종릉부터 올라갔다 와 볼까?

아니면 전시실부터 들어갔다 와볼까?

아니면 전시실 바로 옆에 있는 박충원의 정여각부터 갔다 와볼까?

 

장릉 경내의 정문 앞에서 잠시 장고를 하다가 우선 전시실부터 들어갔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관아에 있던 사람들의 복장과 조선시대에 형벌을 가하던 형틀 같은 것을 관람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때 관아에 있던 사람들의 복장 같은 것과

그 시대의 형틀 같은 것이 전시돼 있는 전시실은 사진촬영 금지 구역이었다.

그 당시 관군의 복장과 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틀 같은 것을 몇 장 촬영하고 싶었지만

사진 촬영 금지구역이라는데 굳이 찍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배신정(拜信亭)

 

여기는 장릉의 가장 구석 자리에 위치하고 배신정이라고 하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무슨 용도로  쓰였던 정자인지 모르겠지만

단종릉으로 들어가는 가장 초입에 세워진 것으로 봐서 릉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초소 역할을 하던 곳?

 

박충원 정여각(朴忠元 旌閭閣)

 

장릉 경내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있는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이 있는데 이곳이 박충원 정여각이다. 

비각 안에 있는 기적비는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박충원은 단종이 운명하고 50년 후에 한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종이 1457년에 운명했으니까 그로부터 정확하게 50년 후인 1507년에 태어난 것이다

승정원 주서(注書)와 홍문관 교리, 명나라 사신 접대 일을 맡아보는 일까지 했던 박충원은

중종 때 대사헌의 탄핵으로 성균관 하급관리로 물러 났다가,

잇단 탄핵으로 관직을 내놓고 시골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영월군수 자리는 죽음의 땅이라 하여 그 누구도 부임하기를 꺼려했는데

그 이유는 영월 군수로 부임하면 영락없이 동헌에서 영문도 모르는 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영월 땅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영월 군수로 지명된 관리들은 부임을 회피하니 썩을 대로 썩은 관리들과

지방 호족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 가기만 했었다고 한다 

 

박충원 정여각(朴忠元 旌閭閣)

 

단종이 영월 땅에서 사약을 받고 운명을 한 뒤로 조선 조정에서는

인종 때부터 내려오는 근심이 있었다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수년 동안 자리를 비어 두고 있는 강원도 영월 군수직을 제수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수할 사람이 없다기보다는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예부터 영월 군수직은 지방 수령 중에서도 손꼽히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종 말부터는 괴상한 소문이 일고, 부임해 간 사또는 그 첫날밤에 까닥 모를 죽음을 당하니

누구도 영월 땅에 가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월 군수에 제수되면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했다고 한다.

인종은 이를 막기 위해 영월 군수에 제수된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부임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에 처하겠다고 영을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임한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월군수직을

임금인들 신하에게 더는 권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데,,,

 

영월 군수직이 비어 있는 수년 사이, 관아는 퇴락하고

지방 관족들과 토호세력들의 착취는 더욱 심해졌고  급기야는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여러 곳에서 도둑 떼들이 일어나 가뜩이나 시달리는 백성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박충원은 이번 기회에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다시 찾겠다는 각오로

영월 군수직을 자청했다고 한다

군수로 부임하던 날 동헌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비장한 각오로 첫날밤을 보내는데, 

그 날밤 단종의 혼령이 나타났다고 한다

전임 사또들은 혼절해 죽어 나갔는데 박충원은 태연하게 앞을 쳐다보았더니,

그곳에는 사육신을 양옆으로 거느린 단종이 옥좌에 앉아 있었기에, 순간 박충원은 큰 절을 올리면서

 

"상감마마! 신 박충원 삼가 문안 드리옵니다. 그간 성수무강하오신지요!"

이렇게 안부를 여쭈니 내려다보고 있던 단종이 박충원에게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박교리! 이 험한 곳을 오느라고 수고가 참 많았오. 짐의 유택이 심히 불편하여 영월군수로 하여금 

짐의 유택을 옮겨 달라하기 위하여 영월군수를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이곳에 오는 도중에 요귀들의 희롱에 놀라 죽고 마니, 짐의 유택도 유택이려니와 

죽은 전임 영월군수들에게 짐의 심기가 매우 괴롭소!

허니 박교리는 짐의 유택을 옮겨주오!"

 

이때 박충원이 바닥에 엎드려 "상감마마!" 하고 외치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데

그 스스로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깬 박충원은 꿈이었음을 깨닫고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 날 박충원은 관속들을 거느리고 엄흥도의 후손과 함께 단종의 무덤을 찾았는데

무덤은 잡초로 가리어져 황폐하고 흔적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박충원은 조정에 상소하여 암장되었던 단종의 릉을 이전하여 봉분하고 

예를 갖추어 제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그 후 동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박충원도 승승장구 승진하여

형조판서, 병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 이 내용은 옛날에 전설 따라 삼천리 "영월 장릉" 편에서 들었던 내용임 -

 

박충원 낙촌비각(駱村碑閣)

 

이 비각은 영월 군수 박충원의 충신 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2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라고 하니까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세워진 비각인 것이다 

 

제실(齊室)

 

여기는 단종릉을 지키는 참봉 한 사람과 수호군졸 아홉 사람이 기거하였다고 하는 제실이다 

매년 단종 제사를 지낼 때 이곳에서 제사에 쓰일 제물을 준비하고

각종 제기를 비롯한 기구들을 보관해 오던 곳이라고 한다

 

제실(齊室)

 

제실 내부 모습

 

제실 내부 모습

 

제실 내부 모습

여기는 제실의 가장 끝 부분인데 저 구석 자리에 있는 작은 건물은 칙간이라고 하는 곳이다

 

제실 앞 출입문

 

장릉 경내를 흐르는 개천

 

장릉 경내를 흐르는 개천

 

제사때 쓰이는 물을 퍼올리려고 만들어 놓은 영천(靈泉)

 

여기는 장릉(莊陵)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 영천(靈泉)이라고 하는 우물인데

정조 때인 179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장릉의 제사 때 쓰이는 우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숙종 때 단종비각이 세워지고, 일백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만들어진 우물이다 

평소 때는 물이 조금씩 솟는 편인데 매년 제사를 지낼 한식 때가 다가오면

평소보다 많은 물이 솟는다고 한다.

 

저기 돌담으로 둘러싸인 중앙 부분에 사각모양으로 뚫린 웅덩이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영천(靈泉)이라고 하는 우물이다

저기 영천(靈泉)이란 우물 속에 동전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이 동전을 얼마나 많이 집어넣었는지 우물 안에는 십 원짜리 동전을 비롯하여

백 원짜리, 하다 못해 오백 원짜리 동전이 우물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젠가 강원일보에서 읽었던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영천 속에 던져진 동전이 오래될 경우에는

샘이 부식되어 물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 안에 있는 동전을 모두 거두어

수재 위연금으로 전달했다고 하는데 근 삼십여만 원 가까이 나왔다는 것이다

 

엄흥도 정여각(嚴興道 旌閭閣)

 

엄흥도 정여각은 단종릉 올라가는 입구 재실 옆에 위치하고 있다

충의공이라 불리는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운명하자,

그 시신이 동강변에 버려졌다고 하는데, 엄흥도가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몰래 매장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수양(일명 세조)의 엄명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이 없자, 엄흥도가 야밤을 이용해

아들과 함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매장하고 가족들과 함께 어디론가 잠적했다고 한다

훗날 엄흥도의 이러한 공이 인정되어 충신으로 모셔졌는데,

그의 정여각이 영조 때 청주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30여 년 만에 영월로 옮겼다가 다시 1970년에 단종릉 옆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엄흥도 정여각이 현재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7년 전의 일이 되는 것이다

 

엄흥도 정여각(嚴興道 旌閭閣)

 

배식단사(配食壇祠) \

 

여기는 단종비각과 릉을 지키는 수복실이 세워지고, 약 60년 후인 정조 때 건립한 것이라고 하는데,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위패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자군노(宦者軍奴) 28인,

여인 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이 위패를 모셔둔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금성대군과 같은 종친, 성삼문과 같은 충신,

그리고 환관, 궁녀, 노비등을 모시기 위해 축조되었는데

한식 때 단종제향과 함께 여기에 제물을 차려놓고 이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들을 위해 제향을 올리는 배식단이 따로 설치된 것은

다른 조선왕조의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이곳 단종왕릉에 세워진 것은 좀 특이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수복실(守僕室)과 단종비각(端宗碑閣)

 

여기는 장릉(莊陵) 경내에 있는 수복실(守僕室)과 단종비각(端宗碑閣)인데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수복실이고 뒤로 보이는 작은 건물은 단종비각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저 뒤, 산꼭대기 능선 왼쪽으로는 단종릉이 자리 잡고 있다

수복실은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이고 단종비각은 단종의 생애와 단종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 비각이다 

 

앞에서 본 수복실(守僕室) 모습

 

저 수복실에서 능지기가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단종릉을 지키던 곳이라고 하는데

영조 때인 1,733년에 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각(丁子閣)과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능지기가 약 270년 경부터 생활하기 시작해서 언제까지 지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한일 합방 전까지는 이곳에 능지기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정면에서 본 단종비각(端宗碑閣)

 

숙종 때인 1698년, 이 비각을 세우기 전까지는 노산묘(魯山墓)라 부르고 있었는데

이때 이 비각을 세우면서 노산묘(魯山墓)라 불리던 것을

왕릉으로 격상시켜 장릉(莊陵)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저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단종대왕의 짧은 생애가 이력서처럼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단종릉 주위에서는 저 단종비각이 가장 먼저 세워지고, 그로부터 35년 후인 1733년 영조 때,

능지기가 기거하던 수복실(守僕室)과 제사를 지내던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단종릉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각(丁字閣)

 

조선의 어떤 왕릉이든지 왕릉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홍살문을 지나야 한다.

이곳 정자각 앞에도 홍살문이 있어서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편집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잠시 설명을 덧붙여 본다

 

홍살문은 잡귀신을 막고 신성한 경내임을 알리기 위해 붉은색 화살모양으로 된 쇠창살 문이다

그리고 그 홍살문을 지나서 저 위에 보이는 정자각까지 길이 이어져 있어

이 길을 따라 정자각을 오르는데  정자각(丁字閣)이란 말은 건물이 한자의

천간 정(丁) 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는 곳이다

그러니까 저기 보이는 정자각은 단종 제삿날에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고,

영조 때인 1733년에 능지기가 기거하던 수복실(守僕室)과 함께 같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영월읍 영흥리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단종릉

 

조선시대는 그 어떤 왕릉이라도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백리 안쪽에 자리 잡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장릉은 단종이 유배 중에 운명을 마쳤던 곳이므로 그 시대의 완고한 원칙에서 벗어나

한양에서도 천리나 떨어진 아주 외진 지방에 봉분했던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릉이다

장릉은 조선의 제6대 임금인 단종의 능으로서, 단종의 시신이 강가에 버려졌던 것을

영월의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지금 현재의 자리, 영월읍 영흥리에 몰래 묻고 

가족들과 함께 잠적해 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70년 후인 1526년 중종 때 영월군수 박충원에 의하여 봉분이 다시 꾸며졌다고 한다

17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1698년 숙종 때,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란 글씨를

단종비각에 새겨 놓으므로서 그때부터 장릉(莊陵)으로 격상시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단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그다음 해,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이란 난을 일으켜

문종과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과 김종서를 등을 참살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단종은 상왕의 신분으로서 창덕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단종이 창덕궁에서 2년 정도 되었을 때,

사육신이 상왕 복위를 꾀하다가, 그 기밀이 누설되어 사육신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2개월 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뜻하지 않은 홍수로

거처를 영월군내의 관풍헌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곳에서 사약을 받을 때까지 약 1년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영월 지방에서 내려오는 야사에 위하면 2년 이상을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경북 순흥(지금의 영주시 물야면 부근)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의 작은 삼촌 금성대군(수양의 동생)과 순흥부사 등이 단종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다가

기밀이 또 누설되어 관련자 모두 참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단종은 영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결국 운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단종의 시신이 어떤 일설에 위하면, 영월 동강변의 아주 후미진 곳에 버려졌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설에 위하면 영월 군내를 흐르는 두물 머리에 버려졌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동강변에 버려졌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당시는 수양(일명 세조)이 조선 땅에서 단종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려고 작정을 했었기 때문에

영월 군내에 있는 두물머리 보다는, 아주 첩첩산 깊은 골짜기에 처박혀 있는 동강변에다 버렸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계략도 칠삭둥이라고 불리는 한명회의 머리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청령포라는 햇볕조차 잘 들지 않는 아주 음기가 성성한 장소를 유배지로 진언한 사람도

바로 그 한명회라고 하는데, 단종이 죽어서 흔적조차 없어지는 방법까지 연구한 사람도

바로 한명회가 아니었을까? 

당시 단종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한명회였다 

단종의 흔적이 조선 땅에 남아 있으면, 또 후환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첩첩산으로 둘러싸여 어둑한 음지인 동강변으로 진언한 사람도

바로 한명회라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한명회의 소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은 한명희의 소행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는 단종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끈질기게 진언하여 수양이 왕위에 오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대가로

73살까지 장수하면서도 영의정까지 오르는 등, 말년까지

온갖 부와 영화를 누리며 호화롭게 살다가 간 인물이 아니었던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아무런 죄도 없는 어린 단종을 권좌에서 몰아낸 다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여 놓고는, 정작 자신들은 충신들의 여자들을 첩과 노비로 삼는 등,

온갖 부귀영화와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73살까지 장수하며 살았다 

 

지금 현재 한명회 묘지는 천안 수신면에 있는데 시신이 없는 가묘다 

한명회는 1487년에 죽어 17년 후, 연산군에 위해 부관참시  능지처사를 당해 

머리를 한양 번화가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연산군 친모 폐비 윤 씨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이유에서다 

 

무인석이 없는 조선시대 왕릉, 단종릉

 

조선시대 왕릉은 모두 능 앞에 문관 석상과 무관 석상이 같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곳 장릉에는 문관석 상만 자리 잡고 있을 뿐 무관 석상은 없다.

단종 복위와 관련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300명에 가까운 숫자라고 했으니,

그 숫한 충신들의 죽음을 그저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던 단종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아 보이기는 하지만 양의 석상을 비롯하여

각종 장식물이 알맞게 배치가 되어있어 그렇게 조촐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능 뒤로 담장이 바람막이 하듯 둘러쳐진 모습이 보이는데

담장과 릉 사이에 호랑이 석상과 양의 석상이 무덤 앞에 세워져 있었다

 

무인석이 없는 조선시대 왕릉, 단종릉

 

여기는 단종릉에서 내려다본 장릉 경내 풍경이다

가장 오른쪽으로 잘려 나간 사진은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보이는데, 오른쪽부터 단종비각, 수복실, 배식단이다 

 

단종릉에서 내려다본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는 곳인데, 사진에서 보다시피

건물의 모양이 한자의 천간 정(丁)으로 생겼다.

그래서 정자각(丁字閣)이라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