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09년 8월에 촬영된 사진들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 고려시대 초기부터
미륵 대원터란 큰 사찰이 있었던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약 7~800m 정도만 들어가면 70년 대 말에 발굴된 미륵사지 대원터의 유적지가 있는데요
그 유적지에서는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출도 되기도 했던 곳이죠
경상도 지방에서 문경을 지나 계립령(지금의 하늘재)을 넘어오면 깊은 골짜기에
비교적 넓게 펼쳐진 평평한 분지가 있는데요
그 분지에는 미륵사 대원 터라는 큰 사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사찰 주변으로는 마방(馬房) 시설까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마방(馬房)이란 당시 계립령(하늘재)을 넘던 상인들이나
관료들이 쉬었다 가는 오늘날의 여관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문경에서 시작해 50리 길의 계립령(하늘재)을 넘어 미륵리에 도착하면 날이 저물었을 것이고
날이 저물면 상인들이나 관료들이 이곳에 준비된 마방(馬房)에서 하루를 보냈었다는,,,
마을에서 미륵사지 대원터 입구까지의 약 7~800m 구간은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는 구간입니다.
물론 하늘재도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죠.
때문에 자동차는 미륵사지 주차장에 세워놓고 순전히 걸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주변의 농가들과 울타리 없는 사과밭, 복숭아밭, 그리고 옥수수밭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천년 전 이 길을 지나다녔던 옛사람 하나 만날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90년에는 중원 미륵사지 위치한 지역 행정구역이 상모면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미륵리는 충청북도 충주시와 경상북도 문경시를 연결하는 하늘재(계림령)가 시작되는 구간이기도 한데요
이곳에 천 년 전부터 석굴암 같은 석굴사원이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한데 석굴은 모두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저 끝에 보이는 석불입상과 오 층 석탑,
그리고 군데군데 박혀 있는 석조물의 흔적들만이 천년 전,
이곳에 큰 사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죠
송계계곡 부근에 있는 사자빈신사지 석탑처럼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비문들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봐서
언제 적 사원인지는 확실한 연대는 알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륵대원이라고 새겨진 기왓장 하나는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적을 발굴한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일명 미륵사지 대원 터라고 명명하게 되었다네요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도 미륵대원이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일연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의 시대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일연스님은 고려시대 초기인 1200년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살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비슷한 성격의 사기를 남겼던 스님이었죠
아마 모르면 몰라도 이 부근에 있는 사자빈신사지의 사자석탑이 세워졌던
그 시기에 경영되었던 석굴사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자빈신사지는 이곳에서 송계계곡 덕주골 방향으로 약 2Km 떨어진 골뫼골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석탑의 기단부에는 1022년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1번 - 미륵리 석불입상
2번 - 미륵리 석등
3번 - 미륵리 5층석탑
4번 - 석등
5번 - 충주 미륵리사자귀부
6번 - 온달장군 공깃돌
7번 - 미륵리 삼층석탑
8번 - 미륵리 대원터 발굴 현장
9번 - 화장실
중원 미륵리 사지 안내문에 보면 이곳은 1970년대 말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요
당시 미륵당(彌勒堂), 미륵당초(彌勒堂草), 원주(院主), 명창 3년
대원사 주지 승 원명(明昌三年 大院寺 主持 僧 元明)이라고 새겨진 기와들이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네요
이런 이유로 해서 이곳의 절 이름은 미륵 대원사로 밝혀졌고 당시의 주지스님 성함은 '원명'이었다고 합니다
미륵리 유적 발굴터에서 여기저기 흩어졌던 석물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러면 당시의 사람들은 저런 거대한 석물들을 어떻게 잘랐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일단 큰 돌에 나무쐐기를 박을 수 있게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냅니다
그다음 그 구멍에 바싹 마른 밤나무 쐐기를 박아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물을 부어두면 밤나무 쐐기가 물에 불어서 돌이 갈라진다고 하네요
전에는 이곳이 상모면 미륵리였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와보니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있었더라고요
탑이란 무엇일까요?
탑은 탑과의 줄임말로 불교가 생기기 전부터 무덤을 뜻하며,
불교가 생기면서 석가모니의 유골(사리)을 모시기 위해 만든 조형물을 뜻하지요.
탑을 만드는 재료로는 돌, 금속, 나무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국내에서는 돌로 만든 석탑이 발달하였어요.
탑두부(상륜부)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장식물 보통 청동, 철로 만들며 석탑에서는 그대로 석재를 사용하기도 해요.
탑신부
탑의 층수를 말하며 형태는 3, 5, 7, 9 등 홀수로 구성되지요
기단부
탑의 기초가 되는 부분으로 탑신부와 탑두부를 받쳐주지요.
저 5층석탑 안내문에서 보듯 탑은 머리 부분인 탑두부와 몸통 부분인 탑신부,
그리고 가장 밑부분인 기단부로 조성되는데요
미륵리 5층 석탑은 무너져 내린 부분 하나 없이 탑 전체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탑신부의 층수가 6층으로 보이는데요
가장 위에 올라가 있는 석돌은 탑신부가 아니라 탑의 머리 부분인 탑 두부라고 합니다.
이곳 미륵리의 5층석탑 탑 두부가 다른 사원들의 탑머리에 비해 유난히 커서
몸통 부분인 탑신부로 오인할 수도 있습니다
보물 제95호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삼국 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 통로인 계립령로에 위치한 미륵사지에 석불입상, 석등(石燈),
오 층 석탑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6m의 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1층 기단을 만든 후, 몸통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펴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지붕의 너비가 몸 둘레게 비해 아주 좋으며 각 부분의 조성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
미륵대원지와 함께 마의태자와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그러니까 미륵대원사와 5층 석탑, 그리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불입상 등이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와 관계가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긴 하지만
발굴을 하면서 확실하게 밝혀진 내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북 모양의 석돌이 있으면 그 위에 비석이 있을 법도 한데 여기는 그 비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소실된 것처럼 보입니다.
한데 발굴 조사단은 몇 차례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거북등에 꽂혀 있는 비를 찾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비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충주 미륵사지 귀부(忠州 彌勒里 寺址 龜趺)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269호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北向)하고 있는
길이 605Cm, 높이 180Cm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비석 바침돌이다.
귀부의 배면(背面)은 거북 등의 껍데기 모양을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陽刻)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비 좌(碑座)가 있으나 비신을 꽂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실제 비가 존재했는지는 의문이며
수차례 발굴조사결과 비신을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석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발굴 조사단은 거북 등에 비를 꽂을 수 있는 홈은 파여 있으나 여러 차례 발굴을 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거북 등의 석비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네요.
그 거북 등의 비석이 발굴되었으면 미륵리 석굴사원의 비밀이 한꺼번에 밝혀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석불입상과 5층석탑 사이에 있는 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받침돌은 4 각형으로 위 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의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 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위로는 등을 설치했던 8 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과
상륜부 받침을 두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 이상 미륵리 석등 안내문 중에서 -
여기서 간주석이라 함은 등을 받치고 있는 8각의 긴 돌기둥을 말하는 것이고
상대석은 8각 돌기둥과 석등의 중간에 끼워져 있는 둥근 석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앙련(仰蓮)이라 함은 절의 단청에서와 같이 연꽃의 꽃잎이 위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옥개석(屋蓋石)이라는 것은 석등이나 탑의 가장 꼭대기에 지붕처럼 덮는 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이런 전문용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들려줘 봐야 소 귀에 경읽기나 마찬가지죠.
나도 이곳 안내인에게 들었던 이야기인데 아마 낼이나 모레면 다 까먹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미륵리 절터와 주존불(主尊佛)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으며,
본래 석굴식(石窟式)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횐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며,
불상의 거대한 원통형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대개의 석불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요
이곳 미륵리 석불은 북쪽을 향하여 서 있다는 것이 아주 특이하며
또 현재 석불 입상이 있는 곳은 당시 석굴(石窟)로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위의 안내문에서 이미 설명을 했듯이 이곳 충주 미륵리 석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북쪽 만주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겠다는
고려 사람들의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마의태자의 동생인 덕주공주가 덕주골 덕주사에 새긴 마애불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오빠인 마의태자는 이곳 석불을 북쪽을 향하게 해 놓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떠났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의태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시피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의 아들이었고,
덕주공주는 경순왕의 장녀였죠
현재 이 석불 입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위의 안내문에서 이미 설명을 했듯이
경주의 석굴암처럼 석굴로 이루어졌었다고 합니다.
한데 언제 적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석굴 안에 있었던 목조 건축물들이 불타서 전소되고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저렇게 석축들만 남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은 수없이 많은 외침을 받았던 격동의 시대였죠
거란의 침입, 홍건적의 침입, 몽고군의 침입, 왜구의 침입 등
그런 수많은 전란의 와중에서 이 나라의 유물들이 저렇게 어느 한 부분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은
참 대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몽고군이나 왜구들이 저 거대한 석불 입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나 보죠?
워낙 거대하고 육중한 돌이라서,,,
그런데 이 사원은 경주의 서굴암을 모방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요
여기 부처님은 석굴암 부처님 하고 이미지 면에서나 용모면에서나 옷차림 등에서
어느 것 하나 닮아 있는 점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석굴암 부처님은 토끼 떼 같은 중생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며 겁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
충주 미륵리 부처님은 금방 밭 매다 나온 농부의 옷차림처럼 아주 시골스런 옷차림입니다
그리고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도 후덕한 시골 아저씨 인상인지라
어떤 소원이라도 이야기하면 금방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미륵세계사 대웅전
목조의 색깔이나 지붕의 색깔이 매끄러운 것으로 봐서 조성된 지 얼마 안 되는 듯한
매우 특이한 모양의 미륵 세계사 대웅전 모습입니다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중원 미륵리 사지' (사적 제317호)의 창건 후에 지리적 여건과 역원제도(驛院制度)의 정비로
동쪽에 별도로 역의 기능을 담당하는 원(院)을 세우고 '미륵대원'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미륵대원 계립령동령야(彌勒大院 鷄立嶺東嶺也)' 라 한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 원터는 계립령(지금의 하늘재) 길과 연관되어 고려초기에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에 조령(일명:새재)에 관방시설이(關防施設)이 완비되면서
이곳 원터는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2차에 걸친 중수(重修)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건물지는 '回' 자형 구조로
가운데에는 말을 묶어 둔 마방(馬房) 시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주변의 건물터는
나그네 숙소 및 관리인이 기거했던 건물터의 구조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사찰과 원터의 기능이 같이 이루어진 고려초기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대원터 발굴 현장 안내문에서 보시듯 이 원터는 계립령(지금의 하늘재) 길과 연관되어
고려시대 초기부터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미륵대원터와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계립령에 대하여 잠시 설명하고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고개는 옛말로 재, 령, 등으로 불리어 왔는데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가장 북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나열을 해 본다면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구룡령, 대관령, 단목령, 백복령, 싸리재,
고치령, 죽령, 그리고 하늘재, 새재, 추풍령, 육십령, 여원제 등이 있는데요
그중에서 문헌상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 방금 이야기 한 하늘재(계립령)와 죽령이라고 합니다
하늘재는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충주를 이어주는 재이고
죽령은 경상북도 풍기와 충청북도 단양을 잇는 고개인데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위하면 하늘재는 156년인 신라 아달라왕 때 개통된 고개이며
죽령은 2년 뒤인 158년에 개통된 고개라고 하죠
그리고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계립령과 죽령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구려와의 분쟁지역으로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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