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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문경 하늘재(계립령) 충주 나루터와 통하는 제천 월악산 송계계곡 덕주산성

by 비단왕 2024. 6. 5.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14년 7월에 촬영된 사진들임을 알려드립니다

 

월악산 덕주산성 남문(德周山城 南門)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문경 하늘재(계립령) 충주 나루터와 통하는 제천 덕주산성 남문

충주시와 제천시의 경계인 월악대교를 지나 송계계곡을 따라 약 5Km 정도 올라오다 보면

길옆으로 망폭대라는 우뚝 솟은 바위절벽이 있다.

그 바위절벽 맞은편으로 오래된 옛 성벽이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뻗어 올라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 성벽은 신라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덕주산성이란 성이다

 

덕주산성은 당시 영남지방에서 계립령(하늘재)을 넘어 한양으로 가려면

필히 통과를 해야 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계립령(하늘재)을 넘어 덕주산성 남문을 통과하여 북문을 지나면 곧바로 한양으로 통하는 월악 나루터다.

때문에 덕주산성은 당시에 한양으로 통하는 계립령(하늘재)과

남한강 뱃길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만 가면 계립령(지금의 하늘재)이라는 아주 오래된 고갯길이 있는데

그 고갯길은 신라 아달라왕(156년) 때 개통되어 계립령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하늘재로 불려졌다고 한다

 

156년 신라에 위해서 개통되었다는 계립령(하늘재) - 덕주산성에서 약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

 

계립령(하늘재) 역사 탐방로

 

신라가 156년 그 당시에 풍기, 단양지역의 죽령과

충주 문경지역의 립령(하늘재)까지 진출을 했었을까?

어쩌면 계림령(하늘재)은 진한(신라)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비슷한 크기의 문경지역 부족들이 먼저 개통을 시키고 

150년 후쯤 신라가 그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신라 아달다 왕 때 개통시켰다고 선포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가장 먼저 덕주산성을 축조한 사람들은 백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일설도 있지만

어떤 뚜렷한 근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삼국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배를 해 왔던

신라 때의 성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풍기, 단양지역의 죽령이나 온달산성, 그리고 이곳 계립령(하늘재)이나 덕주산성은

공교롭게도 서울지역과 영남지방을 이어주는 큰 고개와 남한강을 끼고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양 영춘면의 온달산성과 죽령은 남한강의 상류에, 그리고 덕주산성과 계립령(하늘재)은

남한강의 중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이 지역의 성들이 삼국 모두에게 있어서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군사적 뿐만이 아니라 이 뱃길을 장악하게 되면 중국과도 교류하기 쉬운

한강 하류까지 진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과의 무역도 보다 쉬워질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신라 사람들은 간파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계림령(하늘재)보다 2년 늦은 158년에 개통 되었다는 죽령

 

소백산 죽령은 경상북도 풍기와 충청북도 단양을 연결해 주는 재로서 계립령(하늘재)과 같이

신라와 고구려사람들이 국경을 넘나들 때 넘어 다녔다는 재이다

 

계림령(하늘재)보다 2년 늦은 158년에 개통 되었다는 죽령

 

남한강 뱃길이 가장 절실했던 나라는 삼국 중, 신라?

당시엔 신라와 고구려 사람들이 국경을 넘나들 땐 주로 단양, 풍기의 죽령과

충주, 문경의 계림령(하늘재)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낙동강 줄기고 남한강 줄기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은 한양까지 이어지던 뱃길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강원도에서부터 시작해 단양, 충주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 온통 가파르고 험한 산악지형의 연속이다.

때문에 길을 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가장 유력한 운송수단은 뱃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은 뱃길을 장악하기 위해 남한강변에 온달산성이나 덕주산성 같은 거대한 성을 쌓고

서로 간에 각축을 벌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 지역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나라는 당시 신라였지 않았을까?

지형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하기에는 백제와 고구려에 막혀 있어 외교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쉽게 통과할 수 없었던 지역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라는 그 지역을 기필코 차지하고자 집요하게 공격을 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중국으로의 진출을 방해하려고 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놓고 쌍방 간에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불사하였을 것이다

 

월악나루터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충주 제천 덕주 산성은 남한강 뱃길과도 통한다? 

저 앞에 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쪽으로 덕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덕주 산성의 북문이 이쓴 곳에서 남한강 줄기인 월악 나루터까지는 불과 3Km 정도,,,

그리고 단양 온달산성은 산을 내려오기만 하면 바로 영춘 상리 나루터다 

배를 띄우기만 하면 험한 산악지역을 거치지 않고도 한강 하류지역인 한양까지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뱃길이 트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삼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남한강의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을 것이고 

결국 최후에는 집요하게 공격을 했던 신라가 점령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더욱더 굳건하게 성을 증축하고 방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통일신라 시대에는  덕주산성 성의 길이가 10Km에 달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신라 때 쌓았던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지금 현재는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세 개의 성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새로 복원시킨 덕주산성 남문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위에 사진은 월악산 덕주산성 남문인데 저 남문의 문루는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그 옆 거뭇거뭇한 석돌은 예전부터 있었던 석돌이고 횐 빛깔을 띠고 있는 석돌과 문루는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덕주산성 안내문

 

제천 덕주산성(堤川 德周山城

충청북도 기념물 제36

소재지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이 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곽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산성이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일명 동문 주변)과,

그 외곽으로 하성(제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등 네 겹으로 이우러 진 매우 큰 규모의 석성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 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 유적지이다.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 때에도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말기에는 명성황후와의 관련이 있는 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이다.

최근에 남문의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성벽 일부 보수하고 있다.

 

이 안내문에서 보면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 시 몽고에 대항했던 항몽 유적지라고 한다.

고려 고종이라면 재위기간 내내 최 씨 무신권력에 위하여 왕권을 유린당했고

또 몽고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천거해야 했었던 그 시대의 아주 불행한 왕 아니었던가?

당시 이곳에서도 항몽을 했다는데 그다지 큰 전과나 승전보는 없었던 듯하다.

다만 충주지방의 노약자와 여성들을 피신시키고 성을 방어하는데 그쳤고

몽고군도 죽자 사자 이 성을 공략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고려사의 기록에는 고려 고종 42년(1225년) 10월 몽고 장수 차라대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는 덕주산성에서 몽고군과 일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월악산 덕주산성 쪽으로 진격을 하는 몽고군을 중간 협곡에서 기습하여

선봉부대의 기세를 꺾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개경에 있는 고려의 주력부대들도 힘 한번 못쓰고 패퇴한 막강의 몽고군이

지방 군졸들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너무 낯설고 험악한 산악지형이기 때문으로 추정이 된다

참고로 대원령 하늘재의 옛 이름인데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대원령, 또는 계립령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월악산 덕주산성

 

저 앞에 보이는 바위절벽은 송계 8경 중의 하나인 망폭대라고 하는데

망폭대는 기기묘묘한 바위절벽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다.

망폭대 아래쪽으로는 송계계곡을 굽이도는 맑은 물이 흘러가는데

덕주산성과 마주 보고 있어 더욱 교교한 느낌을 준다

필경 천년 전에는 이 덕주의 산성이 저 바위절벽까지 이어졌지 않았을까?

이 성곽을 저 바위절벽에 붙여 놓으면 더 없는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었으니까,,,

 

월악산 덕주산성 남문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 통문

 

최근에 복원시킨 덕주산성 문루

 

덕주산성 문루에서 본 성벽

 

가파른 용마봉으로 뻗어 올라간 덕주산성 성벽

 

저 거대한 성벽들은 당시 누가 쌓았던 것이었을까? 

통일신라 때는 이렇게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축조된 성곽의 길이만 해도 근 10Km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성곽들이 월악산 정상까지 이어졌었다고 하니 당시에 이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성을 쌓다가 부상당한 사람들 또한 얼마나 됐을까?

 

자진해서 성을 쌓는 일에 참여한 군사들도 있었겠지만

분명 반 강제로 동원된 백성들의 숫자 또한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적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명분이 내걸린 일이라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임금으로 동원됐을 것이며

또한 생업인 농사 일도 포기한 채 이 성을 쌓는 공사에 매달려야만 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들이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쳐 3천여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 2천 개는 남한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성들은 어떤 사람들이 동원돼서 쌓았겠는가?

물론 이 나라의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한 채 동원돼서 쌓았다는 것은

애써 추리를 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덕주산성에서 바라본 월악산

 

저 앞, 교량 오른쪽으로는 송계 8경의 하나인 망폭대라는 바위 절벽이 자리 잡고 있고

그곳에서 중원미륵사지 방향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행정구역은 충주시로 바뀐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덕주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름들이 참 많다.

덕주골, 덕주사. 덕주산성 등,,,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의 장녀인 덕주공주의 원력이 당시 이 지방에서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덕주산성 남문 앞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천년 전의 사람들이 이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어떻게 저 높은 월악산 정상까지 성벽을 쌓았을까?

저 월악산 정상을 올려다 보고는 혀를 내두르면서 나는 이곳을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