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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음악

양희은 한계령 노래 따라 가본 설악산 한계령 휴게소, 양양 하조대 해수욕장

by 비단왕 2024. 4. 30.

 

유튜브에서 옮겨온 양희은 한계령 

 

대진항 부둣가에서 하룻밤 노숙하고 다음 날, 다시 동해시 북평으로 향했다 

대진항에서 국도를 타고 20여 분 정도 달리다 보니 거진항이었고 

거기서 다시 남으로 20여 분 더 달렸더니 고성 군청 삼거리였다 

이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곧장 속초로 향하지 않고 그만 진부령을 향하여 방향을 틀었다 

진부령은 아직도 비단왕이 한 번도 넘지 않은 고갯길,,,

다만 90년 대 중반경 어느 여행 책자에 올라온 진부령 정상 흑백사진을 한번 보고 

언젠가는 저기를 꼭 가봐야지 했던 것이 이 기회에 비단왕을 진부령으로 향하게 했다 

그런데 돌발상황 발생,,

당시 그렇게 고즈넉하고 유장하고 처연하게 보였던

진부령 정상에 오르니 빼꼼히 보이는 표지판 하나 

오잉? 진부령 정상 높이가 겨우 520m 라네 

이 정도 높이면 고한 두문동재와 정선 만항재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

그런데 당시는 왜그리 높게 보였던지 

곧장 동해 바다로 뚝 떨어지는 낙차 큰 고갯길이라 그랬던 것일까? 

 

여하튼 고개 정상에서 인제 방면으로 내려오는데 고갯길 도로변은 온통 진부령 황태구이집,

진부령 황태 고을, 진부령 황태촌, 진부령 황태덕장, 진부령 황태 맛집 등등,,,

서울과 수도권의 황태요릿집을 죄다 진부령으로 옮겨 놓은 듯했다 

그때 이런 노래구절이 생각나더군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다시 진부령이 끝나는 계곡, 원통 설악휴게소 삼거리에서 한계령을 넘기로 했다 

요즘 서울 - 양양 고속도로가 생겼다는데 한계령 옛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원통 설악 휴게소 삼거리에서 한계령을 향하다 보니 옥녀교 앞에 옥녀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헐 ~ 옥녀봉이라? 

금강산 옥녀봉처럼 무슨 해괴한 전설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옥녀봉인지, 변강쇠 옹녀봉인지,,,

 

일단 험산 고갯길 하나 넘어야 하니 자동차를 도로변에 세워놓고 군장검사를 해본다 

 

와~~~ 죄다 헝클어진 것이 완전 이판사판 공사판이네 

아! 어지러워! 

어차피 한계령을 넘어야 하니 군장들은 북평에 가서 정리하기로 하고 다시 한계령 정상을 향한다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다 보니 또 갑자기 이런 시 한 구절 떠오른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 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누구였더라? 이 시의 주인공이,,,? 

아하! 전남 보성군이 고향이라는 문정희? 

1960년 후반 경에 등단했다고? 

그렇다면 당시 한계령은 비포장 자갈길 아니었던가?

70년대 초반에 와서야 비로소 도로포장 작업에 들어갔다 하니,,,

 

나도 폭설 내린 한계령 어디쯤에서 못 잊을 사람하고 폭설에 푹 갇혀 봤으면 했던 시절이 있었지

운명이 아닌 발로 묶여 봤으면 했던,,,

 

한계령을 넘으면서 우뚝한 산봉우리들만 보면 또 생각나는 노래 하나, 양희은의 한계령 

그런데 작사가는 설악산 오색초등학교를 다녔던 정덕수 님이라 하던데  

정덕수 님이라 하면 다음 블로그 시절 한동안 비단장수 왕서방과 글친구 했던 분, 아닌가? 

대명은 한사 정덕수였고,,,

여하튼 그분이 18세 때 쓴 시라고 하니 머리가 띵해져 올 뿐이다 

어떻게 들으면 세상을 초월한 선시 한 구절 듣는 듯했고 

어떻게 들으면 저 위에 시 구절처럼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는 낭만 시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늙은 첨지의 푸념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과연 이 시가 나오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그 내막을 알려면 한사 정덕수 블로그를 찾아가 봐야겠지? 

한사 정덕수 님은 설악산 오색초등학교 다닌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6세 때 어머님이 가출하여 이때 것 소식이 없고 

가난한 홀아버지 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살았다는 한사 정덕수 님 

날이렴 날마다 오색마을에서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도 하고 약초도 캤다고 한다 

그러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한계령에 올라가 멀리 인제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는,,,

 

그러다가 14세 서울 봉제공장 생활을 시작했다는 한사 정덕수 님 

18세 되던 어느 가을, 잠시 고향 오색마을에 들렀다가

설악산에 올라 "한계령"이란 시를 쓰게 되었다는 한사 정덕수 님  

이 시가 작곡가 하덕규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의 손을 통해 "한계령"이란 노래가 출시되었다 

노래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시 대부분이 잘려나갔고 

노래 운율에 맞는 몇 구절만 가사로 옮겨졌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한사 정덕수 님에게는 설악산은 늘 미움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6세 대 집을 나간 엄마 생각에 힘들 때마다 한계령으로 가게 되었고 

한계령에서 한을 뛰어넘어 이산 저산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노래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는 더 이상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어서 내려가라고, 등을 떠미는 산 

이렇게 설악은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산이었다

 

장수대와 장군바위를 지나자 멀리 한계령 휴게소가 보인다 

한사 정덕수 님은 그 휴게소 부근 어디쯤에서 한계령에서,, 시를 썼다고 한다 

 

한사 정덕수 님의 시를 노래 가사로 옮긴 하덕규 님도 

한계령은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고개였다고 한다 

고성군에서 자란 시인과 촌장, 하덕규 님도 설악산은 마음의 고향이었다나? 

그래서 한사 정덕수 님의 한계령에서,,, 의 시가 마음에 와 다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작곡가 하덕규 님은 그 작곡한 노래를 선배인 양희은 님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양희은 님의 한계령 노래는 출시한 지 6~7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는데 

한사 정덕수 님도 그제야 한계령 노래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나? 

 

설악산 한계령 휴게소 전망대

 

그렇다면 양희은 님이 불렀던 한계령 ,, 

원 시는 어떤 내용일까? 살짝 궁금해진다 

그래서 여기 한번 옮겨 본다 

 

한계령에서 1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 육천 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이야기로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81년 가을, 설악산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바라보며 썼다는 한사 정덕수 님의 원 시 

 

정덕수 님은 한계령이란 노래가 출시된 지 6년인가? 7년 만인가? 알게 되었다 하고 

원작 시와 노래 가사는 차이가 큰 듯하지만 비슷하다 

시 중간 구절을 따왔으니 ,,

 시인 정덕수는 한계령에서 처절함을 뛰어넘어

이산 저산을 자유로이 넘나 드는 바람과 구름으로 승화하려 하였으나 

결국 노래 가사는 처연함으로 시작하여 처연함으로 끝을 맺고 있었으니 

한사 정덕수 님은 그저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후로도 세월이 몇 년 더 흘러서야 시인과 촌장, 하덕규와 공동 작사가로 선정되었으니 

당시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고 모호했던 시절, 가요계의 무지한 결과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설악 능선

 

설악산 한계령 휴게소

 

한사 정덕수 님이 한계령에서 ,, 시를 쓸 당시만 해도 이 휴게소는 자그마한 구멍가게였었다나?

 

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설악 능선

 

설악산 한계령 휴게소

 

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설악 능선

 

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설악 능선

 

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본 설악 능선

 

오색 야수, 8Km 남았다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표지판

 

정상 휴게소에서 오색약수와 양양으로 내려가는 한계령

 

양양 시내서 동해시 북평으로 가다가 잠시 들려본 양양 하조대 

 

양양 하조대는 기이한 전설이 존재한다 

정도전과 함께 조선 개국 공신이었던 하륜과 조준이 고려 우왕인지 창왕 때 이리로 유배를 왔다나? 

그래서 하조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그 후 태종 이방원이 정권을 잡자 모두 풀려나 고려의 옛 수도 개경으로 돌아갔다는,,

이들이 돌아간 후, 이성계와 이방원에 위해 고려의 또 다른 공신들은 최영이 죽게 되자 

정선 백이산과 고한 두문동재로 숨어들어 평생 칡뿌리와 나무뿌리로 연명하며 살았다는데,,, 

결국 이들은 대부분 최영에 붙었던 인사들이었지 

평생 안전빵으로 태평하게 살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결국 오늘날의 명언만은 아닌 것 같았어 

그들은 지금 현재 정선 땅에서 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조선 개국 공신 하륜과 조준의 전설이 있는 양양 하조대

 

조선 개국 공신 하륜과 조준의 전설이 있다는 양양 하조대

 

하조대 옆, 하조대 해수욕장

 

하조대 옆, 하조대 해수욕장

 

하조대 옆, 하조대 해수욕장

 

하조대 해수욕장 해변도로 

 

하조대 해수욕장 해변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