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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는? 제주도? 함경도 삼수, 갑산, 북청?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by 비단왕 2024. 4. 22.

비단왕이 가장 많이 다니는 시장은 천안 시장과 아산 전통시장, 

그중 아산 전통시장은 일주일에 두어 번 다니는 시장이다 

아산 전통시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시간이 좀 남는 다면 

아산 곡교천 길을 따라 삽교천 선장포 갯벌 김대건 신부 탄생지까지 다녀온다 

선장포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있는 인적이 드문 포구이다  

 

그래도 성에 안 찬다 싶으면 예산 삽교 골목 시장, 덕산 수덕사 길, 고덕 들판, 신암 추사 고택,

당진 면천 읍성, 합덕 전통시장 상록수의 심훈 기념관, 우강의 김대건 신부 탄생지,

그리고 홍성 홍북의 최영 장군 사당, 성삼문 외가 엄찬 고택 등

다소 한산한 마을을 싸돌아 다니다 오기도 한다 

 

천안 아산에도 갈 곳은 많지만 너무 번잡해져서 여간해서는 잘 가지 않게 된다 

이날은 예산 상설 시장에 갔다가 무한천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추사 고택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추사 김정희는 김대건 신부 옆마을에서 같은 동시대를 살다 간 인물이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용산에서 순교할 당시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생활(59~60세로 추정) 하면서 세한도를 그리고 있을 당시였고 ,,,

순조 즉위 20년 김정희가 30세 되던 해 당진 우강에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났다 

 

당시 청나라 고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와

조선 최초의 가톨릭 신부가 만났으면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되었을 텐데,,,

아니, 추사 김정희도 안동 김 씨 노론들의 선동에 바로 그 자리서 참형에 처에 졌겠지 

당시 추사 김정희는 안동 김 씨 노론들의 따가운 시선과 견제를 받고 있는 처지였으니,,,

그러면 추사 김정희는 안동 김씨 아닌가?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안동 김 씨가 아니다 

경주 김씨지  

추사 고택 ,,, 오랜만에 왔으니 한번 돌아보고 가야지 

 

추사 김정희 고택 기념관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아산, 당진 사이에 있는 삽교천 갈대숲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삽교천이란 이름은 사라지고 어느새 무한천으로 바뀐다 

그 무한천 상류 부근에 추사 김정희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 고택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삽교천을 중심으로 합덕 갯벌과 당진의 너른 들판 

예산 수덕사에서 홍성, 서산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내포평야 

산세도 나지막하고 느릿하기만 한데 ,,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행동도 당진, 예산, 홍성 들판처럼 느릿하다

하지만 여기를 터전으로 살다 간 사람들은 어찌 대가 센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지 ,, 

 

홍성의 최영 장군을 비롯, 성삼문, 김좌진, 만해 한용운,

예산의 추사 김정희, 민공 스님, 윤봉길,

그리고 당진의 김대건 신부, 심훈 등, 

모두 다 어지러운 세상 한 깡으로 살다 간 대가 아주 센 인물들이다 

 

추사 고택 안내문에 보면 추사는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 

이렇게 다섯명 명의 왕들을 두루 거쳐간 인물이다 

영조와 정조 때는 그래도 탄탄하게 잘 나가던 인물 ,,

정조가 죽고 10세의 나이로 순조가 즉위한 후에도 인생길은 평탄했다 

순조가 물러나고 헌종은 겨우 8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추사의 파란 만장한 일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디 추사 김정희 뿐이랴? 

이와 또 동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 정약전, 김병연(김삿갓) 등,

노론들의 탄핵을 받아 모조리 유배길에 올랐으니 이제 세상은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의 세상 

이때부터 왕이 대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 입맛 대로 왕을 선택 

순조가 10세에 즉위하는가 하면 헌종은 8세의 나이로 즉위, 22세로 요절하니

그 후로 외척 신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은 풍양 조 씨들이 득세하게 된다 

 

외척 신정왕후는 헌종이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의 대를 이을 마땅한 적자가 없었다 

이때 허둥지둘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나무꾼 강화도령을 급히 입궐시킨다 

그다음은 이판 사판 공사판 ,,, 왕은 그저 무식하면 무식할수록 좋은 거야 

평생 해본 일이라고는 강화도에서 논 매고 밭 매고

나무하던 일 밖에 없는 까막눈이니 얼마나 좋아? 

그저 상소만 올리면 자동으로 결재 도장이 팍팍 찍히고 

그동안 원수 같던 넘들, 유배 보내고 내 입맛 대로 나라를 좌지 우지 할 수 있었으니,,,

신정왕후 조 씨 초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대략 짐작을 할 것이다  

관상이 얼마나 조악한지,,,

관상은 과학이다 

이런 사람이 헌종, 철종, 고종까지 3대 왕에 걸쳐 수렴청정을 했었다 

 

아마 정조가 10년만 더,,, 아니 ,, 5년만 더 살았어도

안동 김 씨 노론들이나 풍양 조 씨들을 완벽하게 일망 타진할 수 있었을 텐데 ,,,

 

또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 종친회에서 강력한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나마 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가 있었기 망정이지 ,, 없었어 봐라! 나라는 그 자리서 절단 났다 

조또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주절주절이여?

 

추사 고택, 추사 체험관

 

추사 체험관 프로그램 요금표

 

그런데 글을 가르치는 추사의 모습이 추사 말년으로 보인다 

추사가 예산 고택에 머물런던 적이 고작해야 20대 초반? 

그것도 한양과 예산을 오가며,,,

여하튼 그렇게 되는데 왜 말년의 추사가 여기에 있을까?  

이것은 아마 말년을 보냈던 과천 과지초당의 모습을 예산 고택에 재현한 모형이 아닐까? 

 

여기서 위에서 세 번째 화순 옹주 홍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화순 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이기도 하고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었으니 그 권세 또한 얼마나 막강했을까? 

실제 추사 김정희는 55세가 되던 해까지는 인생이 아주 순조로웠다 

 

추사 김정희는 젊은 시절, 한양과 예산 고택을 자주 드나들었다는 안내문

 

수도에 새겨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이날 예산 추사 고택에서 움직이는 물체라고는 비단왕과 또 한 커플의 남녀 밖에 없었다 

그러니 문화관광 해설사 님도 어디론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지

 

예산 추사 고택 대문

 

고택 마당에서 바라본 추사 체험관

 

추사 고택은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뜰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랑채 마루에 앉아만 있어도 대문만 열려 있으면 바깥 풍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그렇다면 추사의 사랑방은 찾는 이들에게 훤히 열려있는 그런 공간이지 않았을까? 

 

예산 추사 고택

 

예산군 추사 고택 안내 책자에 위하면 이 고택은 1700년 대 중반경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서 추사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일설에 위하면 이 고택은 방의 칸 수가 100칸이나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칸 수는 20칸 정도밖에 안 된다 

 

추사 고택 뜰에 심어져 있는 모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예산 추사 고택 대청

 

사랑채 현판을 보니 전에 못 보던 현판이 떠억하니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현판의 상태를 보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우학산인 서실? 

이게 무슨 뜻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가 없네 

그러면 그냥 여기는 패스,,,

 

추사 고택 사랑채

 

추사 고택의 농상실

 

한국 전통 가옥의 구조를 보면 대문 양쪽 문간 옆으로 문간채나 행랑채가 있어

하인들이나 노비들이 있던 흔적이 있는데 이곳은 지금 문간채나 행랑채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농상실에 곡식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이는 되주만 있을 뿐이다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추사는 난을 유독 좋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 고택 뜰에는 언제 심어졌을지 모를 모란이 심어져 있었고 

담장 주위에는 청대가 심어져 있었다 

청대는 청숙감을 주고 난은 은둔감을 주지만 모란은 용협하기 때문에 난과는 대조적인 감이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모란은 이미 성장한 로맨틱한 처녀에 비유되고 

청죽은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선비, 그리고 난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은둔자에게 비유가 된다 

난은 사람들의 관상을 개의치 않고 스스로 고독의 미를 즐기는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도회지로 이식되어 길러 지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화초이다 

그래서였을까? 

대청마루 앞 뜰에 난 대신 모란을 심었던 이유가? 

여하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난을 심는 것은 난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난은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화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사 고택 뜰에 있는 모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일설에 위하면 추사는 모란도 참 좋아라 하셨다는데 이 모란은 얼마나 되었을까? 

추사가 있었던 200백 년 전에도 있었을까? 

꽃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 봐도 잘 돼야 20년? 아님 30년쯤 되었을 법한 모란이다 

그렇다면 근래에 누군가 심었던지,,,

 

측면에서 본 추사 고택 죽로지실

 

옛날 고적한 방에서 차를 내려 마신다는 것은 세속의 번잡함을 잊기 위함이기도 했다 

따라서 주변이 시끄럽거나 서로 말다툼하는 장소에서 차를 마시면 깜박 그 맛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차를 마실 때면 될 수 있는 대로 그 상대가 적을수록 좋다 

찻잔 앞에 사람이 많아지면 시끄러워지고 

시끄러워지면 차의 교교한 매력은 상실되고 만다 

 

누가 이야기 했던가? 

혼자서 차를 마시면 세상을 초월하게 되고 

둘이 마시면 난초에 묵향이 배어 나고 

셋이나 넷이 마시면 즐거워지고 

다섯이나 여섯이 마시면 저속해지고 

일곱이나 여덟이 마시면 비꼬아서 박애라고 일컫어진다고,,,

 

추사 고택 죽로지실

 

차를 끓이는 죽로(겉을 뜨겁지 않게 대나무로 감싸서 만든 화로)가 있는 방으로서 

추사가 친구 황상(黃常)에게 써준 다실 이름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글씨라기보다 중국의 상형문자처럼 그림을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화로 옆에서 열이 올라가는 듯한 삐침이나 지붕 아래 작은 공간을 그려 넣은 저 기상천외한 발상,,,

기교가 이 정도쯤 된다면 국내 최고의 기교가 아닐까?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추사 고택의 안채

 

이곳은 사랑채 뒤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안채로서 대청마루와 안채의 문들이 바로 통하게 되어있다 

대문을 열면 ㄷ 자 모양의 안채가 훤히 들여다 보이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꽉 막힌 ㅁ 자 형태를 하고 있다 

집안의 여자들 주 생활 영역을 안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자는 집안의 안 주인으로서 

안채도 집의 내부 깊숙이 위치하여 외부로부터 격리, 보호되어야 했었다 

때문에 한국 전통 가옥 구조를 보면 대부분 저런 식으로 사랑채 대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제한시키기 위해 친척 외에는

남자들을 접견하지 못하도록 한 당시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공간 배치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곳의 안채도 여느 전통가옥에서 처럼 꼭 갇혀있는 느낌을 받는다 

 

추사 고택의 안채

 

제주 유배시절, 가족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 추사의 글 

왼쪽 기둥의 글 :  정좌처 다반향초(靜座處 茶半香初)

고요히 앉아 있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 나는 듯하다 

 

오른쪽 기둥의 글 : 고회부처 아녀손(高會夫妻 兒女孫)

가장 훌륭한 모임은 아들, 딸, 손자 모임이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의 모임이라니? 

이 글은 단박에 봐도 가족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글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고 집안에 이런 글을 써 놓을 리가? 

 

추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유배생활 하던 중,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한 달이 지나서야 받았다 

그 후로도 희망도 기약도 없는 혹독하고 고독한 유배생활은 계속되었고 

자신의 앞날은 물론 가족들의 앞날도 예측할 수 없는 안갯속 정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추사는 유배지에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이런 글을 썼을 것이다 

 

추사 고택 사랑채 대청 마루

 

추사 고택 사랑채

 

영조의 둘째 딸, 화순 옹주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에게 시집와 사랑채로 사용했다? 

여기는 여인들이 기거하는 안채가 아니거늘, 어찌 이런 일이? 

다 같은 여자라고 해서 안채에만 있으란 법 없다,,, 이거지? 

아하~~ 영조의 둘째 딸 화순 옹주라 했지? 

그 정도 백이라면 대갓집 사랑채와 안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도 있겠군 

 

대청마루 오른쪽 글씨 : 대팽두부 과강채(大烹豆腐 瓜薑菜)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왼쪽 기둥 글씨 : 녹음상간 양삼가(綠陰相間 兩三家) 

녹음 사이로 보이는 집은 겨우 두 세 집, 

 

아마 유배시절 가장 좋은 반찬이 두부와 오이, 생강과 나물이었나 보다 

그리고 유배지 앞으로 보이는 집들은 모두 합쳐봐야 겨우 두세 집 밖에 없었던 것 같고,,,

 

사랑채 앞에 걸려 있는 세한도(歲寒圖)

 

이 그림은 추사가 제주도 대정에서 위리안치 유배형을 받고 있을 무렵인 1844년, 

추사 나이 59세 때 자신의 심사를 그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유배 당시 제자인 이상적이 청나라에서 어렵게 구해온 책을 보내 주는 등, 

변함없는 사제의 의리를 지켜 준데 대한 고마움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송백(松柏)은 추운 겨울이 되어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추사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복량수 승련노인(有福量壽 勝蓮老仁)

그런데 왜 여기는 승련 노인이란 호를 사용했을까? 

젊은 시절 그 당당했던 충청우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기개는 어디로 가고 

자신을 스스로 승련 노인이라고 하다니,,,

말년,, 오랜 유배 생활에서 쌓이고 쌓였던 탄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글로써 형상화된 걸까? 

승련노인(勝蓮老人)은 김정희의 또 하나의 호이고 

저 글은 추사 말년 과천 봉은사에 있을 때 썻던 글이 아닐까? 

 

추사 김정희 고택 사랑채 뒷부분

 

추사 고택 안채 뒷부분에 자리한 추사 사당(영실)

 

추사 고택 안채 뒷부분에 자리한 추사 사당(영실)

 

추사 김정희의 영정이 걸려 있는 사당(영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한신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 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형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년 간 유배생활을 했다 

말년에 생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철종 7년)에 작고 하였다 

 

- 이상 추사 고택 안내 책자에서 옮겨온 내용 일부 - 

 

추사가 정계에 몸 담고 있을 순조 때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고 

수재와 민란이 빈번하여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이었다 

당시 김병연(김삿갓)의 조부 되는 김익순이 평안도 선천 부사로 있었지만

홍경래의 농민 봉기군에게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항복했다 

그 일로 인하여 김익순은 처형 되었고 김병연(김삿갓)도 가문을 폐한다는 조정의 명에 따라 

강원도 영월 마대산 골짜기로 들어가 숨어 살게 되었다 

그후 난은 관군들에 위해 겨우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후에도 계속되었고 

삼정의 문란과 민생은 극심에 달하였다 

 

농사도 짓지 못하는 불모지 땅에 세금을 먹이지 않나? 전정 

어린아이에게도 군포를 바치라고 닥달을 하지 않나? 군정 

봄에 모래나 자갈 등이 들어간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몇 배씩 거두어들이지 않나? 환정 

 

여하튼 당시는 하급 관리에서부터 고위 관리까지

너 나 할것 없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과거시험은 무슨 과거시험?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목민심서? 

정약전의 자산 어보는 무슨 빌어 먹을 놈의 자산어보? 

그리고 김정희의 추사체는 무슨 귀신 밤 발라 먹는 소리? 

 

오늘도 슬슬 백성들 삥뜯으러 가 볼까나? 

부지런히 삥을 뜯어야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들에게 재물을 바칠 수 있고 

또 그래야 쓸만한 벼슬 자리 하나라도 살 수 있지 않겠어? 

벼슬을 사느라 돈을 더 많이 썻으니 이제 더 많은 돈을 백성들 등쳐서 벌어들여야지 

 

강화 도령은 철종은 애시당초 맘보바지 헛바지고

눈이 벌게진 안동 김씨와 풍양 조 씨는 백성들 삥 뜯기에 덕욱 박차를 가했지  

이제 나라 살림은 거의 거덜나고 백성들은 전정, 군정, 환정,,, 삼정의 문란에 도탄에 빠지고

드디어 안동 김씨, 풍양 조 씨들의 돈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니

이제; 조선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거지 

 

맘보바지 헛바지 철종이 즉위하고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할 당시 1894년은

추사 김정희 나이가 64세였고 정약용 나이는 78세? 

아니,,, 정약용은 74세 때 목민심서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고 했나?  

여하튼 당시는 조선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죄다 유배를 떠나고 나니

쥐새끼 같은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들만 살판 난 거지 

여하튼 당시는 추사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고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던 시기였어 

 

추사 고택 우물터

 

그런데 이 우물터의 내력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어 

소문에 듣자 하나 추사 고택에 거주하던 이들이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파 놓은 우물이라 하더만 

여하튼 여기도 추사 김정희에 대한 벼라별 소문들이 엄청 떠돌아다니고 있더만 

소문이라고 해야 할지, 전설이라고 해야 할지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주차장 

 

고택 옆, 추사 기념관

 

이야기 한국사 조선시대 형벌란을 보면 유배지는 죄인의 거주지서 600리 이상, 

또는 천 리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하며 죄인이 살고 있는 도(道)가 아니어야 했다 

충청도로 유배 보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지만 충청도로 유배를 보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죄인은 한양에서 삼 천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유배를 보낸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도 삼천리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삼 천 리를 채우기 위해 한양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는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보냈던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함경도는 당시 과연 어떤 마을이었을까?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삼수, 갑산,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감비천불붙이 

(1974년 한국 문학 발표, 80년 대 초 TV 문학관으로 방영) 

 

조선시대 가장 유력한 유배지는 조선에서 가장 험하기로 악명 높은 함경도 삼수와 갑산, 

그리고 함경북도와 평안남도의 경계지역인 산악 지역, 

그리고 함경북도의 가장 변방인 국경선 부근이다 

 

그중 삼수와 갑산은 예부터 하늘을 나는 새도 찾지 않는다는 악명 높은 유배지로 알려졌다 

우리말에 이런 속담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주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삼수 갑산에 가더라고 ㅇㅇㅇ나 하고 보자 

삼수 갑산에 간다 하더라도 먹고나 보자 등등 

그러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하고 싶은 거 하고나 보자 ,, 이런 이야기인 거지 

  평안도 출신 김소월도 삼수 갑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차안서 선생(次岸曙 先生) 삼수 갑산운(三水 甲山韻 

 

삼수 갑산 나 왜 왔노 

삼수 갑산 어드메냐 

오고 나니 기험하다 

아! 물도 많고 산 첩첩이라 

 

내 고향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 갑산 멀더라 

아! 촉도지난(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삼수 갑산 어드메냐 

내 오고 내 못 가네 

불귀로다 내 고향을 

아하~~ 새라면 떠가리라 

 

님 계신곳 내 고향을 

내 못가네 내 못 가네 

오다가다 야속하다 

아하~~ 삼수 갑산이 날 가둡네 

 

내 고향을 가고 지고 

삼수 갑산 닐 기둡네 

불귀로다 네 몸이야 

아하! 삼수 갑산 못 벗어난다 

 

- 이상 김소월 시집에서 발췌 -  

 

겨울이면 평균 기온 영하 20도에 육박한다는 삼수 갑산 

이렇듯 삼수와 갑산은 식량 사정도 아주 궁핍한데다 매우 춥고 지형도 험악하여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으로 가기를 매우 꺼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김소월도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고 46년 후에 태어난 인물이네 

여하튼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8년 3개월, 함경도 북청에서 2년을 보냈다 

그리고 말년 67세에 함경도 북청 유배지서 풀려나 

과천에 과지초당이라는 거처를 마련, 후학을 기르며 남은 여생 4년을 보냈다 

 

예산 추사 고택 옆, 추사 기념관

 

예산 추사 고택 옆, 추사 기념관

 

추사의 어린 시절을 재현한 모형도

 

추사가 큰 아버지 김노영을 양자로 들어가는 장면을 져현한 모형도

 

북학의 대가 박노영에게 학문을 배우는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가 생부 김노겸과 함께 청나라로 가는 모습
추사 김정희의 가계도

 

추사 김정희 연보

 

추사 김정희 연보

 

추사 김정희 연보

 

청나라에서 만난 스승 옹방강

 

추사 생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세한도

 

추사 김정희 기념관 앞에 있는 세한도

 

예부터 동양의 정치가들은 정치 일선에 있을 때는 유가에 입각해 행동해 왔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재야에 뭍혔을 때는 불가에 입각해 행동해왔다 

그 예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랬고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한 세조가 그랬다 

그리고 최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랬다 

 

불가는 동양인의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기분이고 

유가는 동양의 정치가들이 일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볼 때 동양문명이 정적인 박물관이라면 

서양문명은 화려한 불꽃놀이의 축제장이다 

그리고 추사의 무량수(無量壽)와 승련 노인(勝蓮老人)은 

영원한 생명,, 즉 영원한 생명들의 저녁 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