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옛길서 만난 두 여인 이야기
신사임당, 허난설헌 동영상
배경음악 : 슬기둥 5인조 그룹 중
정수년의 해금 연주 > 그 저녁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
"새벽부터 어딜 가시나?"
"네! 먼 곳으로 갑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5시
물건을 바리바리 밀어 싣는 나에게 뒷집 할머니가 물어본 말이었다
새벽잠이 없는 뒷 집 할머니는 늘 새벽 시간 이 앞을 지나간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리론가 가고 있는 거다
한 목숨 다 할 때까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아이들은 좋은 대학이라는 욕망의 전당을 향하여
그리고 성장해서는 돈벌이 잘 되는 직장과 일터라는 욕망을 향하여
모두들 어디론가 먼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거룩한 욕망들이랴
실로 멀고도 먼 여행길이다
여행,,,
여행이란 무엇일까?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집 문밖을 나서면 이미 그때부터 여행(고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깨닫게 된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가지각색의 모양을 보면서
문득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갈망과 애착으로 인하여 본래 나의 모습을 상실한 채 도시에서 표류하고 있는 나
그래서 그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순수했던 자신을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껴 보고자
차에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또 어디론가 먼 길을 가고 있는 거다
영동 고속도로 문막 휴게소
천안을 출발하여 안성, 광혜원, 진천, 이천, 여주, 원주를 지더니
그 험준한 강원도 태맥산맥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부터는 우뚝우뚝한 높은 산봉우리와
그 높은 산턱을 타고 올라가는 감자 밭과 배추밭 사이로 보이는 산골 농가 풍경들이 아득하다
울타리 없는 목조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은 마치 80년 대 산골 풍경을 연상케 한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나를 버리고 너를 채워 주는 일
미움도 증오도 녹여 버리고 오직 사랑과 그리움만 간직하게 하는 일
이것이 영동선 여행의 묘미다
문막 휴게소를 지나 한 시간쯤 달렸을까?
오대산 월정사로 가는 길목이 보였고 차는 어느새 대관령 옛길로 접어든다
평창 진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그 메밀밭에서 여기까지는 지척에 있는 거리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대관령 양 떼 목장이다
언제부터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여기다 양 떼를 풀어놓았지?
이제는 차도 잘 다니지 않는 대관령 옛길
없어도 불편한 이 하나 없는 영동선 대관령 옛길
도로변으로는 온통 양 떼 목장이라는 푯말들이 어지럽게 난무한다
긴가 민가 했더니 역시나 양 떼 목장 푯말이 보인다
요 앞에서 우회전하면 대관령 양 떼 목장이라고 푯말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왼쪽으로 가면 양 떼 목장
그냥 그대로 직진하면 대관령 고개 정상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두 갈래길 대관령에 날이 밝아 오네
드디어 대관령 옛길 정상이다
이 정상을 기점으로 해서 저쪽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평창 진부요
여기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홈 그라운드인 강릉이다
아! 율곡과 허균의 홈그라운드 이기도 하지
비단왕, 오늘의 목적지는 평창이었는데 넋 놓고 가다 보니 대관령 옛길로 접어들었다
비단왕, 집을 나서면서 대관령 옛길을 떠올렸고
대관령 옛길을 생각하니 율곡 엄마 신사임당과 허균 누나 허난설헌이 떠올랐는데
오늘의 목적지 평창 노점 이불을 그냥 지나쳐 버렸네
450년 전 대관령 옛길을 넘나들던 이매창, 이율곡 엄마 신사임당과
허균 누나 허난설헌 집을 찾아가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래도 비단왕 발길은 도사의 주문에 걸린 강시처럼 자꾸 그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예전에 홍성 홍북에 있는 성삼문 외가댁 엄찬 고택을 갔을 때도
마을 입구에서 어슬렁 거렸더니 동네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하더군
"누굴 찾아오셨나?
"저기 성삼문 외가댁 엄찬을 만나러 왔어요"
"여기 촌구석에 뭐 볼 게 있다고 ,, 엄찬댁에 가면 밥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이때 정신이 벌떡 들더군
그렇지 맞는 말씀이여
"홍성 시장으로 가야 밥이 나오고 쌀이 나오는데 내가 왜 이리 왔지?"
아! 잘못 왔네!
그리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 홍성 시장을 갔던 기억이,,,
그런데 여기서도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게 돌아가는 거 있지?
강원도 평창군은 국내에서 인제군과 함께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인제군 면적 1650 제곱 킬로 미터
평창군 1500 제곱 킬로 미터 ,, 서울시 면적의 3배 정도 된다
그런데 인구수는 4만여 명 정도,,, 서울시 인구의 250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서울의 인구 밀도는 평창군의 약 750 배 정도?
여하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마을이다
봉평, 대화, 진부 등이 있는,,,
대관령 옛길을 따라 평창군에서 강릉시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니 웬 기념탑 하나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딜다 봤더니,,,
율곡 엄마 신사임당 시비였다
누가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고 했던가?
그럴듯한 시구절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완전 초 중등 교과서 같은 시다
신사임당은 당시 철두철미한 남자 중심의 부계사회에서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한 세상 살았던 인물 아닌가?
일처다부제가 일반적이었던 조선시대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재혼하지 말라고 요구했던 기록이 있다
다 몰락한 양반 가문 이원수라는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으니
시댁 어른들과 남편 이원수는 헛바지 맘보바지로 보였겠지
그리고 사임당 생전 이미지는 오늘날처럼 현모양처보다는
실력 있는 화가의 이미지 아니었을까?
이제와 다시 보니 현모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양처는 글세? 전혀 아니올시다
그런데도 국내 분위기는 국내의 여성들은 죄다 신사임당을 본받아야 한다,,,라는 분위기다
이런 인물을 현대를 사는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현명한 아내가 되려면 우선 악처가 돼야 한다는데,,,
그런데 오만 원 권에 있는 초상도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거 신사임당 초상 맞아?
박정희 영부인 육영수와도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신 사임당, 본명 신인선 : 사망 연도 1551년 6월 48세
이순신 사망 연도 : 1598년 12월, 53세
그런데 내 고향 아산에서 추앙받는 이순신은 백 원짜리 동전에 있지?
그것도 동전에 있는 아산 이순신은 다 늙은 첨지처럼 묘사해 놓고
강릉 사임당은 원래 초상보다 더 젊게 묘샤해 놨지?
뭐라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오만 원권 지폐보다 동전이라고?
요즘 동전 쓰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뭐라고?
자판기에서 커피나 음료 꺼내 마시려면,
그리고 세차장 세차할 때 동전이 꼭 필요하다고?
아니, 요즘 백 원짜리 동전 넣는 자판기가 어디 있고, 세차장은 또 어디 있다고,,,?
그런데 이건 또 뭐임?
신인선 아들, 이이 아닌가베?
아주 쌍으로 대한민국 지폐를 석권해 버렸네
오호라 ~~ 여기도 성리학자 이황이 있었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지폐에 얼굴을 내민 인물들은 죄다 성리학자들이군
성리학자이면서 화가였던 신인선과 율곡, 이황,,,,,
아니,,, 논어, 공자, 맹자, 대학 ,, 그리고 시경, 서경, 주역 등
사서삼경 나부랭이나 공부했던 성리학자들이 지폐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여기에 얼굴 내밀려면 경제분야에 있던 인물들이 좀 더 이 분위기에 맞지 않을까?
이를테면
정조 때 제주 거상 김만덕이라든지
또 같은 동시대 인삼으로 거상이 된 임상옥
그렇지 않으면 조선 영조 때 목민삼서를 저술한 정약용이라든지,,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성리학자 얼굴이 지폐에 들어갔지?
요즘 논어, 공자, 맹자, 대학,,, 시경, 서경, 주역과 같은 사서삼경이나 달달 외우고 다녀봐라
거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되기 십상이지
아니면 소도시 재래시장 후미진 골목에서 철학관 간판이나 붙여 놓고 있던지,,,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오대산 월정사로 가는 샛길과 진부로 가는 샛길이 보였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새로 뚫린 영동 고속도로를 곧장 지났겠지만
이날은 고속도로 옆으로 나 있는 오대산 월정사 길로 슬그머니 방향을 틀었다
이곳은 평창과 강릉을 이어주는 대관령 옛길이다
간혹 길을 가다 넓고 평탄한 길을 버리고 샛길로 접어들고 싶을 때가 있다
잘 닦여진 평탄 대로를 버리고 슬그머니 샛길로 접어들어 다시 만나는 길
그 길이 비록 희망도 기약도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 빠져 들고 싶은 길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밝고 환한 길, 곧게 뻗은 큰길에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하지만 십몇 년 전 대관령 고속도로가 새로이 개통되면서
이 대관령 옛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여기서부터는 평창에서 강릉으로 가는 지리한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예전에 평창에서 강릉으로 가려면 필히 이곳을 지나야 했다
대관령 새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갯길이 되었지만
불과 십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창군과 강릉시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대관령 옛길은 가파른 데다 굴곡 또한 엄청나기 때문에 눈이 조금만 내려도 넘긴 힘든 악명 높은 고개였다
비단왕이 이 길을 처음 넘었을 때는 아마도 90년 대 초반이었지 않나 싶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딛고 간 흔적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소금을 지고 이장 저장으로 떠돌아다니던 소금장수의 사연과
옹기를 지고 이장에서 저장으로 가던 옹기장수의 사연
비단을 메고 다녔던 비단장수의 사연
그리고 한양으로 과거길을 다녔던 사람들의 사연들이 모여 이런 멋들어진 길을 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다가 힘들면 길을 잃었다고 한다
길은 잃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버리라고 만든 것이지
하지만 요즘의 도로는 지역과 지역 간의 공동체를 이어주며
혈액을 순환시키는 동맥과도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또 어떤 때는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특성을 평준화, 획일화, 동일화시켜
모든 지역 공동체를 닯은꼴 붕어빵, 국화빵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 지역의 특성은 사라지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자본가들만 살찌우게 만들기도 하는 한편
지역 서민들은 점점 자신의 개성과 특성을 잃어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길을 너무 쉽게 뚫어놓은 결과의 소산이 아닐까?
강릉 오죽한 앞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오만 원권 지폐와 오천 원권 지폐
그리고 율곡과 그의 엄마 신사임당 상이다
그렇다면 어디 보자!
오만 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과 실제 초상 신사임당이 같은지,,,
실제 초상화는 인상이 좀 빡세 보인다
현모양처라기보다 현모악처 같은 느낌이랄까?
눈에서 강렬한 레이저를 쏘아댄다
몰락한 사대부 남편 이원수가 어디 파고 들어갈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인상이다
남편 이원수가 이러한 신사임당 앞에 서기만 하면 금세 기가 죽었겠지?
학문적으로 보나 예술적으로 보나 자신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그 유명한 초충도이다
실제로 곤충들과 식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초정밀 묘사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신사임당의 그림이라 추정만 하고 있을 뿐 기록에는 없다고 한다
다음은 포도
이 그림은 신사임당 그림이 확실,
지금 현재까지 기록 남아 있으니까,,,
이 그림은 오만 원 권 뒷면에 있는 그림으로서 매화도이다
매화도는 신사임당의 맏딸 이매창이 그렸다고 기록에 전한다
그러니까 오만 원 권의 앞 면은 신사임당, 뒷 면은 맏딸 이매창,
앞뒷면을 모두 사임당 모녀가 장식했다
이매창 하면 부안 기생이 먼저 떠오른다
부안 이매창은 개성 출신 황진이, 강릉 출신 허난설헌과도 쌍벽을 이루었던 인물,,,
하지만 부안 이매창은 서자,, 어머니가 관비였고
황진이도 아버지가 양반이었으나 서자로 태어났다
당시 서자들은 어머니의 신분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최선이었지 않았을까?
남자도 서자이면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으니 성과 이름도 없는 여자는 말할 수도 없었겠지
허균도 서자이긴 했지만 허균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
군수, 병조좌랑, 화해도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
허난설헌은 아버지 허엽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랐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사대부 가문, 안동 김 씨 사대부 집에 정실로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사임당 맏딸, 이매창은 정실의 딸이었으며 그의 그림은 사임당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대부들의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부안 이매창은 허난설헌과 연배가 비슷한 동시대 인물로서
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인물이다
허난설헌 보다 10년 늦게 태어났던가?
강릉 이매창과 부안 이매창은 나이도 비슷한 데다 둘 다 동시대 인물이었으니 헷갈릴 수밖에,,,
그리고 부안 이매창은 허균과도 교류가 있던 인물로서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 또 하나,,, 허 난설헌이다
신사임당과 같은 강릉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정확히 이야기하면 신사임당이 죽고 12년 후에 태어난 인물이다
만약 신사임당이 10년만 더 살았으면 난설헌과도 조우했을지도 모른다
신사임당의 시와 그림이 교과서 적이고 모범적인 것이라면 것이라면 난설헌 시는 즉흥적이다
그때그때 그 상황과 조건에 따라 즉흥적으로 시를 쓴다
신사임당의 글이 모범 답안지라면 허 난설헌의 시는 자기 장액에서 우러나온 진액과 같은 시다
글씨로 치자면 신사임당이 한석봉의 모범 필체라면 난설헌은 자유자재한 추사체와도 같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허난설헌의 앙간 비금도이다
어린 여자 아이치고는 글씨의 획도 굵직하고 힘이 있어 보인다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는데 허난설헌 자신과 아버지 허엽을 그린 그림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하는데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고 있는 허난설헌
언 듯 그림으로만 봐도 그 시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참 자유분방하고 화목한 집안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전달된다
허난설헌은 7세 때 시를 써서 여신동이라 불렸다
하지만 조선에서 여자가 붓을 들고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소박맞을 짓이었다
그렇게 허난설헌의 시들은 조선에서 철저하게 암장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허난설헌의 시가 엄청난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허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 자신이 쓴 시들을 불태워 소각했지만
동생 허균이 누나 난설헌의 시들을 종이에 옮겨 중국에 전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47세의 나이로 죽고 12년 후, 허난설헌이 태어났다
그것도 강릉 땅에서,,,
신사임당은 시집살이 기간보다 친정살이 기간이 훨씬 더 길었기 때문에
글과 그림도 더 자유롭게 오래 전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조선은 세종, 세조로 넘어가는 시기에도 결혼 풍습은 고려 풍습을 그대로 따랐다
그때만 해도 "시집"이란 말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장가"란 말이 존재할 뿐이었다
"장가"는 문자 그대로 장인집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남자가 결혼을 하면 우선 장인 집에 들어가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일정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여자를 시집으로 데려가는 풍습이다
그런데 허난설헌은 15세의 나이로 결혼, 곧장 한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이유는 조선 시대 결혼 법령이 그 사이 확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난설헌도 몰락한 안동 김 씨 사대부집 김성립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그리고 호된 시집살이에도 그녀의 주옥같은 시 작문은 계속되었다
허난설헌은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시집을 가서 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어린 딸이 죽고 얼마 안돼 어린 아들마저 죽었다
그리고 뱃속에 셋째 아이가 있었지만 유산되고 말았다
당시 전염병이 조선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시로 읆었다
이 시 구절에서 보면,,, 서럽고 서러운 광릉 땅에,,,라는 문구가 보인다
처음에는 광릉을 강릉으로 잘 못 읽었다
그래서 어? 여기서 왜 강릉이 나오지?
분명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시집갔는데 ,,?
해서 다시 보니 강릉이 아니라 광릉이었다
광릉은 지금 현재 남양주?
지금도 중국 국가 도서관에 난설헌의 시집들이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조선 명종 때 강릉 허난설헌의 집
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전 난설헌의 글이나 시집은 모조리 난설헌에 위해 불태워졌다
죽기 전 자신의 시들을 모조리 소각시켜 버린 것이다
이때 남동생 허균이 누이의 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엄청 좋은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그대로 종이에 옮겼다
그리고 서애 유성룡에게 달려가 그 시집을 보여주었다
잠시 후 그 시집을 펼쳐본 유성룡,,,
허어~~ 이런 여인이 조선에 있었다니,,,?
자신이 지금까지 봤던 교과서 같은 시들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에
유성룡은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허균에게 조선인들의 시집을 구할 수 없느냐는 성화에
허균은 허난설헌의 시집을 전해 주었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 여인 시집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명나라 관료들은 꾸역꾸역 허균을 찾아왔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조선에도 여성 시인이 있으며 그 수준도 높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사회는 여성이 글을 쓰거나 시를 짓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는데
허난설헌은 글을 어떻게 배웠을까?
그것은 아버지 허엽이 당시 조선의 완고한 고집을 허물어 버리고
아들 딸, 구분 없이 공평하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서자 출신 이달을 이들의 글선생으로 붙여 주었다
이렇게 되어 결국 이들은 쟁쟁한 문벌 가분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허엽, 혀봉, 허난설헌, 허균으로 이어지는,,,
학산초담은 허난설헌이 죽은 후 허균에 위하여 만들어진 당대의 시 평론 집이다
여기서 허균은 누이의 시를 이렇게 평한다
난설헌의 시어들은 음식을 익혀 먹는 속인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고 ,,,
당시의 조선 사회 관습으로 봤을 땐 이렇게 즉흥적으로 나온 시는 전무후무했다
그러니까 난설헌의 시는 음식을 익히지 않고 그대로 먹는 생식과도 같은 즉흥적 시이다,,
라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허균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 조선에 노비들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회제도였는데
양반, 상놈 계급차별을 없애자는 소리는 양반들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당시 지배계급들은 허균의 창의적인 홍길동전 등을 혹평했다
허균은 현실을 도피하고 망상에 사로잡혀 양반 관료 계급들을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그런 과대망상이나 하다 보니 사회혼란을 야기시키는 소설 나부랭이나 쓰게 되었다고,,
그러니까 당시의 관료계급들은 허균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늘 경계하는 인물 제1호로 점찍었다
그 결과 그는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역모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관료들은 노비의 숫자가 곧 부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비의 숫자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유성룡의 10만 군사 양병설은 무슨 개코같은 소리
일단 노비를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 상책이야
그 결과 군사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전쟁에 나가 싸울 군사가 부족하다 보니 섬나라 왜구들의 침략이나 당했던 거지
왜구들과 8년 전쟁을 하면서 군사들의 맹활약은 이순신 말고는 전무했다
그러니까 승병이 조직되고 의병이 조직되어 대항했던 거지
당시 여자들은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이런 상태였고 이를 개탄했던 허균은 조선관료들의 경계의 대상이었다
신 사임당,, 본명은 신인선이라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마저 이름과 성이 확실치 않으니
일반 평민들이나 노비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난설헌의 본래 이름은 허초희
단사는 난설헌집에서 전하는 유일한 산문이라고 한다
8세밖에 안된 아이가 상량문을 지었다니 ,,,?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다
읊노라
구름 수레는 빛과 모양의 경계를 넘었고
은빛 누각에 해 비치니 노을 젖은 기둥은
미혹된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났구나
음악을 연주하니 난간 옆 어린아이가 춤을 추는데
영롱한 보물이 신선의 옷자락에서 떨치고
반짝이는 별빛관은 머리에서 꾸미개로 빛을 내는구나
옥으로 장식한 서까래 끝은 햇빛에 빛나고
붉은 누각은 안갯속에 우뚝한네
비단 창에는 별빛 흘러
구름 밖에 푸른 행랑이 펼쳐지네
-이상 허난설헌이 8세 때 지었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학산초담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난설헌의 재주는 배워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이태백과 이장길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라고,,,
이장길은 당나라 때의 시인 임
난설헌은 15세 때 몰락한 사대부댁으로 시집을 갔다
물론 난설헌이 원해서 간 시집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맺어 주었으니 할 수 없이 간 시집이었지,,,
남편은 김성립으로서 4대인가? 5대인가? 연속 벼슬을 했다는 안동 김 씨 집안
하지만 유독 김성립만은 과거에 계속 낙방,,, 빈둥빈둥 세월만 보내던 한량이었다
이러한 김성립이 아내 허난설헌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겠지
그리고는 "나 돌아갈래~~~" 했겠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
시어머니는 여자가 글이나 쓰고 시를 써서 뭐 하냐고,,,
우리 집에 사람이 잘못 들어와 집안꼴 이 모냥 이 꼴이라고 구박이지
남편 김성립은 계속되는 과거 낙방에 기생집이나 드나들며 술로서 세월을 보내지
자신이 봐도 난설헌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문장 실력을 가졌지
이러니 김성립은 아내에게 열등감만 쌓여가고 있었던 거지
시어머니는 여자의 글이 담을 넘어가면 집안 망할 징조라 구박하지
여하튼 허난설헌은 당시 곧장 시집으로 떠났던 조선 최초의 시범케이스 인물이었다
남자가 결혼하면 우선 처가에 들어가 산다는 조선의 결혼 풍습이 허난설헌 때 깨졌다
이 풍습은 고려 풍습이 조선 중기까지 그대로 어어졌는데
여기에 대하여 말을 하자면 조선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세종이 함경도 북쪽 국경지역 6진을 개척한 김종서에서 묻는다
"경은 우리나라 결혼 풍습이 촌스럽다 생각지 않는가?
남자가 결혼하면 처갓집에 가서 살아야 하는 풍습이,,,
중국처럼 결혼하면 여자는 곧장 시집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이때부터 조선의 결혼 풍습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흐지부지 되고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 중종, 명종 때까지 이어지다가
임진왜란을 격은 선조 때에 와서야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
장가가는 것이 아니라, 시집가는 것으로,,,
여하튼 광릉(남양주)에서 호된 시집살이 하던 허난설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1580년, 상주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아버지 허엽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과
또 지금까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던 큰 오빠 허봉의 객사,,,라는 비보가 연속 겹치게 된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의 계속되는 주색잡기,,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대로 우리 집에 사람이 잘못 들어왔어,,, 따가운 눈총 ,,,
"여자가 집에서 글이나 쓰고 있으니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지?"
그 후 큰 딸아이와 작은 아이의 죽음
이제 더 이상 살아야 할 명분도 사라진 허난설헌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아리따운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구나
23세에 몽유광상산시에 글 몇 자 남겨놓고
4년 후, 허난설헌은 27년의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4년 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조선 선조 때의 일이다
후대에 와서 영조 때 북학의 대가였던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규중 여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이 원래부터 좋은 일은 아니다
조선의 한 여자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일찍이 이름이나 자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의 호 하나 만으로 과분한 일이다
후에 재능 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비단왕, 대관령 옛길에서 신 사임당과 허 난설헌을 만나고
다시 대관령을 넘어 평창 읍내로 돌아왔다
여기다 이불을 내려놓고 가야 하니,,,
그런데 이 사람들,,,
이불 장사를 하러 온 거야?
아니면 캠핑을 온 거야?
이들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장똘뱅이들
얼마 전까지 충남 바닷가 태안에서 장을 펼치더니 어느새 강원도 평창까지 왔네
평창강 앞, 노점 이불을 펼친 장똘뱅이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영월랜드 휴게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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