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21년 8월 1일 촬영된 고한 구공탄 시장 사진들입니다
그리고 2008년에 촬영된 정선군 고한 공설시장 사진도 몇 장 섞어 보았습니다
제천을 출발하여 영월역, 함백역, 그리고 해발 700m 산꼭대기 자미원역에서
가파른 협곡길을 타고 ㄱ 자 코스 길과 8 지 코스 길을 따라
빙글 뱅글 돌아 돌아 숨차게 숨을 헐떡이 내려오니
증산역(민둥산역)이라고 하는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옛 탄광도시가
그 옛날 번영했던 모습을 재현이라도 하듯, 그 모습을 드러냈다
증산역(민둥산역) 다음역은 사북역이다
사북과 고한은 70!~80년 대 탄광촌으로 한때 번영을 누렸던 유명한 동네였지만
산이란 산은 모두 구멍이 뚫리고 파헤쳐져 지금 현재까지도
사북, 고한은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죽음의 하천으로 남아 있다
태백선 증산역은 지금 현재 민둥산역으로 역 명칭이 바뀠지만 2000년 대 후반까지는 증산역이었다
당시;증산역에서는 정선선 선로를 따라 정선역, 아우라지역, 구절리역까지 갈 수 있었고
또 사북역, 고한역, 정암터널을 지나 추전역과 태백역으로도 갈 수 있었다
증산역(민둥산역)에서 정선 사북역을 지나니 고한이었다
여기는 고한 공설시장(구공탄 시장) 들어가는 입구인데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국내서 두 번째로 높다는 산꼭대기 자미원역과 같은 높이다
정선 고한 공설시장(구공탄 시장) 골목의 전체적인 모습은
90년 대 모습과 그 뼈대는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골목 바닥을 모이이크식 타일로 씌워놨다는 것과
전통시장 들어가는 출입구를 탄광의 갱도 모양으로 조성해 놓았다는 거,,,
이것만 빼면 고한 공설 시장(구공탄 시장)은 90년 대 모습 그대로다
정선 고한 구공탄 시장 3번 갱도 - 2021년 8월 1일 촬영
고한 공설시장(구공탄 시장)은
탄광이 한창 호황을 누리던 60년 후반에 고한 공설시장으로 출발했다
지금 현재도 시장 안에는 약 벡여 개의 생필품, 수산물, 잡화, 먹거리 식당 등이 있다
고한 공설 시장,,
지금은 구공탄 시장으로 명칭이 바꿨지만 2000대 까지는 이렇게 공설 시장이란 현판을 붙이고 있었다
당시는 전국의 전통 시장들이 시나, 군에서
시장 현판도 달아주고 시장 안의 지붕도 아케이드 지붕으로 씌워주고 했었지만
몰락한 탄광촌 사북과 고한은 그것 마져 었었다
당시 사북과 고한은 강원랜드라는 대규모 카지노 업체가 이주해 들어왔지만
몰락한 탄광 도시 경기는 밑바닥을 맴돌고
상가와 집값이 크게 떨어져 사북, 고한 주민들은 영세민으로 전락하던 때였다
2008년 당시 정암사에서 고한읍 방향으로 5분 정도 내려오다 보니 검은 탄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탄전이 한창 호황기일 때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북적였던 도시였지만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 사북과 고한 사람들 열 명중 아홉 명은 이런 탄광을 터전으로 밥을 먹고살았다
그 수많은 탄광의 광원들이 도시를 다 빠져나갔는데도
사북 고한의 산들은 이처럼 검은 빛깔로 뒤덮여 있는 예전의 석탄 공화국 그대로였다
그 탄전에서 계곡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개천의 모습이 모두 짙은 황갈색을 띠고 있다
1 급수 열목어가 서식한다는 그 정암사에서 조금 내려왔을 뿐인데,,,
그러면 70년 대 정암사에서 스님 생활을 하셨던 적음 스님 이야기를 잠시 옮겨 볼까 한다
淨 岩 寺 - 崔 永 海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태백(太白)의 준령이 굽이굽이 감싸고 도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면 고한리(古汗里).
좁은 협곡을 따라 개딱지처럼 눌어붙은 광부촌의 지붕 위로, 눈발은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초라한 역두(驛頭)에 서서, 나는 한참이나 망연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탄더미, 시커먼 화차(貨車), 그리고 시커먼 얼굴의 시커만 작업복의 사내들.
아무도 살지 않는 듯한 겨울 저녁나절의 탄전지대에,
그들 작업복의 사내들만이 무어라 고함지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거운 걸망을 추스르며,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정암사(淨岩寺). 말로만 듣던 정암사로 가는 것이다.
차가 겨우 지나다닐만한 길 좌우에, 식당과 술집과 상점들이 스산하게 늘어서 있었다.
붉은 천이 펄럭이는 중국집으로 들어가서 나는 짜장면을 시켰다. 그리고 길을 물었다.
- 정암사요? 여기서 십리쯤 돼요. 그쪽으로 버스가 하루 세 번씩 다니는데, 막차가 벌써 끊어졌을 거요
주인인듯한 오십 대 사내가 난롯가에 앉아 있다가 이쪽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했다.
- 걸어가도 얼마 안 걸려요. 이 신작로를 따라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시면 바로 정암사 입구가 나타나요. 한 사십 분 걸릴까......
나는 걷기로 했다. 탄가루와 눈비로 버무려져 얼어붙은 울퉁불퉁한 길은 한결같이 검었다.
목청껏 뽑아내는 노랫소리, 젓가락 장단소리가 여자들의 기성과 함께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는 적막한 마을의 공기를 흔들어 놓고 있었다.
길 주변은 온통 술집이었다.
홍등(紅燈)을 켠 낡은 유리문짝 안에 한복을 차려 입은 짙은 화장의 여인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이 땅의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다, 여기 후미진 변경의 탄전 마을에 지칠 대로 지친 나래를 접은 짙은 화장의 여인들. 짙은 화장, 두꺼운 가면을 벗으면, 거기 삶에 찌든 고뇌로 얼룩진 얼굴이 원망과 분노의 빛깔을 띠고 드러나리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메말라 가는 거친 얼굴이 슬픈 빛깔을 띠고 이윽히 드러나리라.
그들은 기다린다. 막장에서 돌아온 비번인 광부들을 기다리며 그들은 천천히 담배를 피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농촌에서 어촌에서도 번화한 도회에서도 발붙일 곳 없어 마지막으로 탄가루 날리는 이곳을 찾아든 남정네들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운다.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 다시 도회로 나갈 연연한 꿈을 지닌 채, 짙은 화장을 지우고 본래의 면목을 되찾을 날의 그 건강한 웃음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운다.
허나 그녀들의 그 소망은 한갓 소망으로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오래 가면을 벗지 못하고, 그 가면 속에서 가면의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탄전지대에서 살다 온 스님으로부터 스산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들은 독신인 광부들과 눈이 맞아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그 광부가 죽으면 보상금을 타서 훌훌이 먼 곳으로 떠나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다시는 탄가루 날리는 피폐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미련 없이 떠나간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쩐 일인지 자꾸만 돌아오곤 한다.
돌아와선 다시 동거생활을 하고 떠나가고......
삶의 막장, 지하 수백 미터의 수직갱에서 광부들이 시커먼 탄덩이를 캐내듯 그녀들은 막장에서 무엇을 캐내고 있을까.
탄을 실은 트럭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얼마쯤 올라가다가 후미진 골목길에 있는 주점을 찾아들었다.
거기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사십 전후의, 알맞게 살이 오른 여자가 나를 맞았다.
막걸리와 빈대떡, 빈대떡과 막걸리를 마시고 먹으며 이글거리는 난롯가에서 몸을 녹였다.
- 여기 온 지 십 년도 더 됐어요. 처음엔 정말 지긋지긋했지요. 매일같이 싸움질이었으니까요. 몇 번 떠났다가 다시 와서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이젠 정이 들었어요.
내게 담배를 권하며, 그녀는 피로하게 웃었다.
- 정이 들었다고 해서 여기서 평생 눌러 살 생각은 없어요. 곧 대처(大處)로 나가야지요. 딸년을 생각해서라도......
그녀는 안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선 텔베리전 소리가 새어 나왔다.
- 국민학교 이 학년짜리 딸이 하나 있어요. 단 두 식구지요. 저년은 아비 얼굴도 몰라요. 두 살 때 죽었으니까요.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세 명이 한꺼번에 죽었어요. 하긴, 여기서야 늘 있는 일이지만. 병신 되고 죽어 나왔다는 소리를 하도 들으니까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여기 술 먹으러 오던 이가 며칠 안 보이면 글쎄, 요망스런 생각이 든다니까요.
막걸리 한 되가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나는 잔을 비우고 그녀에게 마지막 것을 따루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저문 날의 목판화 - 제21회
淨 岩 寺 - 崔 永 海
- 아니, 벌써 가시려고요? 여기서 얼마 안 걸린다니까요. 늦으면 제가 탄차를 주선해 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 한 잔 더 하고 가세요. 제가 살 테니까요.
그녀는 나의 소매를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이때 유리 문짝이 드르륵 열리고 작업복 차림의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그녀가 반색을 했다.
- 김 씨, 웬일이세요? 며칠 안 보이길래 어떻게 됐나 했지요. 거기 추운데 일루 와서 앉으세요.
서른 가까이 돼 보이는 그 사내는 몹시 추운 듯 몸을 웅크리고 내 앞에 앉아 불을 쬐었다.
- 그래, 어딜 갔다 오셨수?
사내의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가 물었다.
한 잔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킨, 사내는 깍두기를 씹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 박 씨 알지요? 그 양반 왼쪽 다리가 잘렸어요. 갱목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암반에 깔렸어요.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그래서 원주 도립병원까지 데리고 가서 치료받는 걸 보고 오느라고 못 왔어요. 참, 큰일은 큰일이오. 아직 사십도 채 안 된 사람이.....
- 병신으로 한평생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 그런 말 마시오.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 하는 거요.
- 내 말은, 쥐꼬리 만한 보상금으로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그거예요. 가진 재산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인데, 그것마저 못 쓰게 됐으니 박 씨도 참 딱하게 됐군요.
- 어디 박 씨뿐이겠소. 나도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니겠소.
- 그러니, 내 이쁜 색시 하나 소개해 줄 테니 함께 사시라고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재미나 보다가 죽어야지.
그녀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 악담하지 마시오. 누구 좋은 일 시켜 줄라고 내가 그따위 년들 하구 살아요.
사내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창백한 그의 얼굴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더욱 병자처럼 창백해 보였다.
- 이젠 막장도 지긋지긋해졌어요. 하도 다치고 죽어대는 걸 많이 보노라니, 어떤 땐 글쎄 막장에 들러갈라치면 살이 부르르 떨린다니까요.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내게 술을 권했다.
- 정암사 가시는 길이구먼요. 혹시 내가 죽으면 염불이나 잘해주시오. 이놈의 지긋지긋한 세상 슬프게 살았으니, 저 세상에 가서라도 좀 편해져야 안 되겠소.
- 김 씨, 괜한 소리 말고 술이나 들어요. 사람 목숨이 어디 그리 쉽게 끊어질라구요. 다 제 명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 명은 무슨 놈의 명이요. 막장이 무너져 다섯 사람 열 사람이 한꺼번에 생매장되는데도 명을 말할 수 있겠소. 다섯 사람 열 사람이 한날한시에 죽으란 명은 도대체 무슨 명이오.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부르렁 거리며 지나다니는 탄차 소리, 싸움질하는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 목청껏 뽑아대는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그 침묵의 공간을 메웠다.
나는 그들과 작별하고 밖으로 나왔다.
희끗희끗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더욱 굵어져 있었다.
정암사는 우리나라 사대(四大)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하나다.
불타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 놓은 탑(수마노塔)이 있기 때문에 정암사의 법당엔 불상이 없다.
고한 탄전 계곡에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은 이곳뿐으로, 절 위에 수원지가 있다.
천연기념물인 열목어(熱目魚)가 오르내리는 이 정암 계곡은,
여름이면 고한 사람들의 유일한 휴식처가 된다.
앞산도 첩첩 뒷산도 첩첩, 첩첩이 둘러쳐진 거대한 산봉우리 틈서리에서,
정암사는 천년의 침묵을 지닌 채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원각산중생일수 (圓覺山中生一樹)
개화천지미분전 (開花天地未分前)
비청비백역비혹 (非靑非白亦非黑)
부재춘풍부재천 (不在春風不在天)
원각산중에 한 그루 나무 있으니
천지가 둘로 나뉘기 전 꽃을 피웠네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아니하고
봄바람 속에도 저 하늘에도 있지 않네
법당의 원주(圓柱)에 걸려 있는 게송(偈頌)을 읊으며, 나는 오래오래 뜨락을 거닐었다.
- 저 탄광 때문에 절 버렸어요. 지금은 겨울이라 얼어붙어서 괜찮지만, 여름엔 먼지 때문에 엉망입니다. 마루를 하루에 몇 번씩이나 닦아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이십사 시간 내내 지나다니는 트럭들의 소음이 절의 고요함을 깨뜨려 버렸어요.
저녁 예불 후 차를 마시며, 총무를 맡아보는 스님이 말했다.
과연 그랬다. 바로 절 앞으로 도로가 뚫려, 그리고 쉴 새 없이 탄차가 지나다니고 있었다.
저문 날의 목판화 - 제22회
淨 岩 寺 - 崔 永 海
겨우내 눈이 내렸다.
밤중에 잠에서 깨면, 뒷산에서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툭, 툭하고 둔탁하게 들려오곤 했다.
그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다시 듣다가 하면, 새벽 예불의 도량석 목탁이 울렸다.
새벽 예불이 끝나면 심부름하는 아이 보련화(寶蓮華, 본명은 미정인데, 우리가 법명으로 그렇게 지어 불렀다)가 오가피차를 갖고 왔다.
그 산에는 오가피가 많아, 줄기를 잘게 썰어 말려 두었다가 이렇게 겨울에 끓여 먹는 것이다.
- 어제저녁에 전화가 왔는데......
총무스님은 히죽히죽 웃으며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 무슨 전환 데요?
- 다름이 아니고, 탄광에서 사람이 하나 죽어 오늘 화장을 한답니다. 그래서 염불을 좀 해달라고 부탁이 왔어요. 마침 부전스님(절에서 염불을 맡아하는 소임)이 외출 중이니 스님이 좀 가 주셔야 되겠습니다.
나는 쾌히 응낙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진실로 염불해 주리라.
- 여기 있으면 이런 일이 무척 많아요. 사고가 자주 나니까요.
저기 법당에 있는 위패들 대부분이 광부들 것입니다.
그는 찻잔을 놓고, 내가 가야 할 상가(喪家)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아홉 시쯤, 약도를 들고 찾아간 곳은 광부촌이었다. 정확히 말해, 광부들의 사택이었다.
방 둘, 부엌 둘의 성냥곽 같은 집들이 산비탈에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그 네 칸 일동(一棟)에 두 가구가 산다고 했다.
곡소리가 들리는 집을 찾아, 나는 두 시간쯤 염불을 했다.
사자(死者)에겐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아들은 통곡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칭얼거렸다.
그 옆에서 사자의 친구인 듯한, 아침부터 술에 불거진 얼굴의 사내 두서넛이 통곡하는 부인을 위로했다.
열한 시쯤 스리퀴터가 왔다. 관을 화장터로 싣고 가기 위해 회사로부터 온 것이다.
차는 출발했다. 울부짖는 부인과 두 아들을 남겨 두고, 그들의 가장(家長)을 태워버리기 휘해 스리퀴터는 출발했다.
절 앞을 지나고 탄광 본부를 지나고, 차는 굽이굽이 도는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갔다.
올라가서 차는 어느 등성이에 정지했다. 멀리 황지(黃地)가 내려다 보였다.
구덩이를 얕게 파고, 거기다 반을 자른 드럼통을 묻고 관을 얹고 석유를 끼얹었다.
더러는 낫으로 생솔가지를 쳐서 쌓아 올렸다.
활활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불길은 기세 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자, 시커먼 연기가 미친 여자의 풀어헤친 머리칼처럼 온통 허공에 흩날렸다.
불길이 약해질 때마다 연신 석유를 끼얹었다.
그러면 불길은 다시 허공을 향해 춤추곤 했다. 옆에선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로 막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몇 사람은 이미 취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제꼈다.
살이 타고 있었다. 뿌지직뿌지직 살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듯한, 눈이 내릴 듯한 잿빛 하늘 아래,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살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펑하는 소리가 났다. 배 터지는 소리였다.
-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는군. 그래, 잘 가거라. 가서는 다시 오지 마라.
술을 마시고 있던 이들 중의 하나가 이렇게 내뱉었다.
냄새와 열기를 견디며, 드럼통 옆에서 나는 계속 염불을 했다.
생솔가지를 처넣던 사내 하나가 문득 고함을 질렀다.
- 아니, 이놈이 가려면 곱게 갈 것이지 사람 놀라게 해.
보니, 시체의 발이 드럼통 언저리에 걸쳐져 있었다.
마치 산 사람처럼 갑자기 발이 쑥 뻗어 나왔으니 놀라기도 했으리라.
다리의 근육이 타들어 가는 작용 때문에 그리 된 모양이었다.
술 먹던 사람들이 와서, 막대기로 뻗어져 나온 발을 밀어 넣었다.
시체는 오래 탔다. 뿌지직뿌지직,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시체는 오래오래 타고 있었다.
그 곁을 떠나, 나는 다박솔 아래 주저앉아 멀리 황지를 내려다보았다.
뻗어나간 탄맥(炭脈)을 쫓아 마을이 이루어지고, 외지로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하여 마을은 붐빈다.
첩첩한 태백 준령의 골짜기들은 그 본래의 정적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인 것이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가 다 탄 모양이었다.
준비해 온 버드나무 젓가락으로 뼈들을 추려내고 있었다.
옆에선 추려낸 뼈를 기왓장에 올려놓고 잘게 부수고 있었다.
잠시 후, 가루가 된 뼈를 그들은 허공에 흩뿌렸다.
다 끝난 것이다. 서투른 마지막 의식이 모두 끝나 버린 것이다.
그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떠들썩하게 남은 술을 마셔대었다.
한 차례 세찬 바람이 지나갔다. 그리고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들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해 검붉은 얼굴의, 시뻘건 혓바닥의 야차.
돌아오는 스리퀴터 속에서도, 그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 제꼈다.
발을 구르고 팔을 휘저으며, 그들은 한없이 한없는 노래를 불러제꼈다.
빗방울은 소나기가 되어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울부짖는 듯한 그들의 노랫소리가 자욱한 비안개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이상 70년 대 당시 고한 정암사에서 스님 생활을 하시던 적음 스님의 이야기를 여기 잠시 옮겨봤다
당시 사북 고한의 광부들이 탄광의 막장에서 탄을 캐다 막장이 무너져 누구는 불구가 되고 누구는 죽고,,,
그 죽은 사람 시신을 수습했던 적음 스님의 이야기였다
이곳은 고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일한 아파트인데 옛날 광원들의 아파트인 듯하다
두문동재(싸리재)를 넘는 길목에 세워져 있었고
아파트 앞을 흐르는 하천 역시 온통 짙은 황갈색과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아파트 규모에 크지만 이 부근을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적막감 마저 감돌고 있었다
간혹 두문동재 터널 쪽으로 지나는 차량들만 휑하니 지나다닐 뿐이었다
사북과 고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떠났고, 차마 떠날 수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
손에 쥔 것도 없이 떠난 사람들의 앞길도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깜깜 했겠지만
탄광이 문을 닫은 폐광촌에 남은 사람들의 살 길 또한 막막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업이 바닥을 드러내면 인심은 흉흉해지기 마련이다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디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몸부림을 쳤고
어딘가 둥지를 틀곳을 찾아 모두들 두리번거렸지만 끝내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 탄광촌에서 목돈 좀 벌어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왔던 사람들은
지금쯤 이 하늘 어느 아래서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때는 이나라 경제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던 그 탄광 마을들이
요즘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고 외면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그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올 따름이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이만큼 발전을 이루며 풍요롭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도
모두가 다 탄광의 막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구슬땀을 흘렸던 사람들과
그 지역의 회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국가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사람들이나
또 거기에 들러붙어 부동산 투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비싼 땅은 더욱 비싸게 몇 곱절 가격을 부풀려 놓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는 국가의 경제를 재건시켰던 탄광마을에 대해서는 그저 냉담한 반응만 보이고 있으니
점점 더 쓸모없는 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물론, 형평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서울 강남의 50평짜리 모 아파트 한채 값이면
백산이나, 또는 철암의 상가들을 몽땅 사 들일수 있는 돈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 못 되어가고 있는 거 아닌가?
사실 이곳의 막장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을 했던 사람들은
국가 경제를 재건시킨 국가 유공자들이 아닌가?
믈 맑고 산이 푸르르다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뭐라도 할 수 있겠지만
온통 사방팔방 탄더미로 뒤덮인 검은 폐광촌에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같은 정선군이라 해도 정선읍 장날에는 많은 인파들이 북적거리고
정선 아우라지나 정선 소금강, 그리고 정선 화암약수터 정도만 돼도 사람들은 알아서 몰릴 것이다
하지만 사북, 고한, 태백, 철암 같은 지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다 파헤쳐져
흉물스럽게 그 검은 뼈대만 드러내고 있었고
하천이란 하천은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죽음의 개천으로 변해있었다
70~80년 대 광부들은 이런 갱도를 들어갈 때
"오늘도 무사히,,," 하면서 엄숙하게 기도를 올리고 들어갔지만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런 갱도를 들어가면서 깔깔거리며 들어간다
탄광의 갱도의 실체가 어떤 건지 아직 모르니까,,,
고한 구공탄 시장에는 연탄들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사북 고한에서 내 세울만한 것이 연탄밖에 없았나 보다
그렇지!
정선읍을 가로지르는 조양강 같이 맑은 하천이 있나?
그렇다고 눈부시게 푸르디푸른 산이 있나?
그러니 연탄이라도 예쁘게 꾸밀 수밖에,,,
한때 이나라는 쌀은 없어도 살 수 있었지만 석탄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이 나라의 민중들이 쌀과 같은 식량보다도 더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이 바로 연탄이었다
그래서 사북과 고한, 그리고 태백, 백산, 철암, 도계, 함백 등지의 막장에서
50여 년 동안 탄덩이를 채굴하고 이 나라의 민중들은 바로 연탄을 쌀보다 더 귀하게 생각했다
고한 구공탄 시장 다원 연탄 구이는 연탄을 이렇게 초벌을 한 후 나온다
이렇게 해야 화력이 좋고 연탄가스도 올라오지; 않으니까,,,
구공탄 시장 다원 연탄 구이에서는 삼겹살을 시키면 이렇게 시래기 된장국이 달려 나온다
얼큰하고 구수한 맛의 구공탄 시장 시래기 된장국
사실은 이날이 정선군 5일장 고한 장날이었다
고한 장날은 끝자리가 1일, 6일이고 이날은 2021년 8월 들어 첫 번째 장날인 8월 1일이었다
정선군 5일장 고한 장날에 대해선 따로 포스팅을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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