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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삼족 멸족당한 성삼문, 지금 그의 고향은? 홍성 성삼문 유허지, 부모 부인묘

by 비단왕 2024. 5. 13.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09년 7월에 촬영된 사진들임 알려 드립니다 

 

홍성군 홍북면 소재지 - 2009년 7월 촬영

 

7월 장맛비가 꾸준하게 내리던 날, 나는 덕산에서 홍성시장으로 가고 있었다

홍성읍이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 도로변에 "성삼문 유허지"라고 쓰여있는 작은 푯말 하나가 보였다

순간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라?

여기서도 성삼문 유허지 들어가는 길이 있나 보네

 

나는 이렇게 중얼 거리며 홍성시장이 아닌 그 작은 푯말이 가리키고 있는 대로 가고 있었다

덕산 - 홍성간 지방도에서 홍북면으로 방향을 틀어 약 7~8분 정도 달려왔더니 흥북면이었다

표지판엔 직진하면 삽교읍이고 우회전하면 금마면과 성삼문 유허지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예산에서 홍성으로 가는 4차선 국도를 타고 가다 화양역 부근에서 들어가면 찾기가 조금 쉽지만

이날 나는 덕산시장에서 홍성시장으로 가던 도중에 들어왔으니 길이 조금 복잡해진 것이다

 

화양역과 삽교역 사이의 철도 건널목  - 홍성군 홍북면(2009년 7월 촬영)

 

홍북면 소재지에서 홍북 초등학교 앞을 지나 약 5분 정도 진행하다 보니

화양역과 삽교역 중간지점에 있는 장항선 철도 건널목이 보였다 

건널목을 넘어 오른쪽으로 약 2Km 정도만 가면 성삼문 선생 유허비가 있는 노은단(魯恩壇)이다

 

홍성군 홍북면 철도 건널목 앞 - 2009년 7월 촬영

 

화양역과 삽교역 사이의 철도 건널목을 건너면

최영장군 사당과 성삼문선생 유허지로 들어가길목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성삼문선생 유허지까지는 약 1.5Km 정도 거리고 

최영장군 사당까지는 약 3Km 정도 된다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 유허비 - 조선 숙종때 석비(石碑)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유허비와 노은단 앞 길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다

노은리 마을 전체가 죽은 듯이 고요 했다.

차를 도로변에 세워놓고 가까이 갔더니 유허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홍주성선생유허비 은진 송시열(洪州成先生遺墟碑 恩津 宋時烈)

선생(先生) 아세종대왕조명신야(我世宗大王朝名臣也)

 

비석에 글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지만 너무 오래돼서 글자들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까지 까막눈이다 보니 비석의 글씨가 시작 되는 부분만 옮겨 보았다

그러니까 저 비석은 1668년에 홍주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돌로 추모의 표시를 해 놓았는데

그 후송시열이 글을 짓고 김진상이 썼다는 비석이다.

성삼문이 운명한 지 210년 만의 일이었다  

 

유허지 안내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선생의 유허지이다.

선생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물은 일이 있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성삼문 선생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로 자(字)는 근보(謹甫),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다.

1456년(세조 2년)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668년(현종 9년)에 민유중(閔維重)이 홍주 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이 살았던 유허를 돌아보고

선생이 태어난 노은동(현재의 홍북면 노은리 상리부락)에 돌로 추모의 표시를 하였는데,

뒤에 송시열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게 되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김진상(金鎭商)이 썼다.

 

- 이상 성삼문 유허비 앞 안내문에서 옮겨온 글 -

 

성삼문 유허지 안내문

 

위에서 민유중이 홍주 관찰사로 왔을 때 성삼문의 유허를 돌아보고

선생이 태어난 노은동에 추모의 표시를 해 놓았다고 했는데

민유중은 인조 때인 1630년에 태어나 호조판서 벼슬을 지냈으며

당시 노론의 거장이었던 송시열을 추종한 사람이다

송시열은 1607년에 태어난 인물로 주자학의 대가였으며 노론의 거두이기도 했다.

송시열의 유허비는 영동 황간면 월유봉이 있는 곳에도 있는데

송시열은 그곳에 한천정사를 세우고 후학들을 가리키기도 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리고 김진상은 숙종 때인 1684년에 태어나 대사헌의 좌삼찬 벼슬까지 했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당대의 거두들이 성삼문 처형 200년이 지난 후, 유허비를 짓고 쓰고 세웠다는 사실은

후대 왕조에서도 성삼문의 충정을 높이 평가 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성삼문 유허비옆에 있는 또 하나의 비석 -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 유허비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있었는데 저 비석은 위에 있는 비석보다

마모 상태가 더 심하여 글자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성삼문선생의 가묘가 있는 노은단(魯恩壇) -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이곳 노은단은 선생의 외할아버지 고택이 있던 장소이면서 선생이 출생했다는 곳이다

대원군의 서월 철폐령 때 이곳에 있던 녹운서원이 헐리게 되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폐를 묻고 노은단이란 단을 세웠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날 제향을 올린다

 

노은단(魯恩壇)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는 성삼문 선생 사적기

 

종일 내리는 비로  인하여 성삼문선생의 일대기를 새겨놓은 비석엔

빗물과 송악가루가 뒤범벅이 되어 한 글자조차 알아보기 힘든 상태다

 

성삼문 가묘가 있는 노은단(魯恩壇) -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 선생의 유품 등이 묻혀 있다는 묘 -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은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세종대왕의 유언을 끝까지 지켰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145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던 사람들은 양쪽 다리를 각각 다른 말 수레에 묽어 팔과 다리를 찢는

이른바 차열형이라는 형을 받았다는데 몸의 일부분은 한 강의 남쪽에 떨어져 있었고

또 다른 일부분은 한 강의 북쪽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을 내려 어느 누구도 감히 시신에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하는데

김시습이라고 하는 사람이 새벽시간을 틈 타 각각 찢어진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부근에 묻고는 자신은 평생 방랑생활로 생을 마감 하였다

그래서 성삼문과 사육신들의 진짜 묘지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게 된 것이다

 

노은단(魯恩壇)에서 내려다 본 홍북면 노은리 마을

 

성삼문 사당앞에서 본 노은리 마을

 

이곳에서 왼쪽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노은단이 세워지기 전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성삼문 외손댁인 엄찬고택과 성삼문 부인묘, 그리고 성삼문 부모 묘가 나온다.

그럼 이번에는 성삼문 부모묘와 부인묘로 발 길을 돌려 본다

 

홍성군 홍북면 상리

 

홍북면 노은리 마을에서 금마면 방향으로 약 1.5Km 정도 진행하다 보니

성삼문 부모 묘와 부인 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상리 마을에서 왼쪽으로 약 300m 정도만 가면 성삼문 선생 외손댁인 엄찬 고택이고

직진하여 고개 하나 넘으면 성삼문 선생 부모 묘와 부인묘가 나온다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이곳은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라고 하는 마을인데 성삼문 선생의 부모 되시는 성승장군 묘가 있는 곳이다.이다.

도로변에 세워진 푯말을 따라 오른쪽으로 300m 정도 내려가면 성승장군 묘지가 보인다

그런데 이곳도 한나절을 있어도 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아주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묘 - 홍북면 대인리

 

녹슨 안내 표지판에 '성승장군 부부묘'라고 되어 있었지만

성승장군 부부 묘지로 올라가는 길은 잡초가 무성하여 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겨우 올라가 보긴 했는데 그래도 묘지는 벌초가 말끔하게 되어 있었다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묘 - 홍성 홍북면 대인리

 

저 위에 있는 묘는 성삼문 부모인 성승장군 부부 묘이다 

왼쪽에 있는 묘지는 성삼문 어머니 묘고 오른쪽이 아버지인 성승장군 묘이다

 

성승장군 부부묘에서 내려다 본 홍북면 대인리 마을

 

이곳에서 노은리 방향으로 약 500 ~600m 정도만 가면 성삼문 부인묘가 나온다 

그러면 이번에는 성삼문 선생 부인 묘를 한 번 가 보겠다

 

홍북 - 금마간 지방도

 

저 앞 도로변 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을 올려다보면 성삼문 부인의 묘가 바로 보인다

 

성삼문 선생 부인 묘 - 홍성군 홍북면 상리

 

성삼문 선생 부인 묘는 홍성군 홍북면 도로변에 있어서 비교적 찾기는 쉽지만

이곳은 한 나절을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동차 한 대 만나기 힘들 정도로 한적한 곳이다

 

성삼문 부인 묘비

 

제단 정면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증이조판 축(贈吏曹判 蓄)

성삼문 처(成三問 妻)

증정부인 김 씨 지묘(贈貞夫人 金氏之墓)

 

성삼문 부인은 신 씨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제단에는 왜 김 씨라고 새겨 놓았을까? 

아! 성삼문 큰 부인이 신 씨고 작은 부인이 김 씨라고 했던가? 

성삼문은 작은 부인 김차산,,,

조선 시대는 여자의 이름이 그리 필요치 않았던 시대 

여자의 성과 이름이 후대까지 전해진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성삼문 부인 묘지에서 내려다 본 상리 마을

 

이곳에서 왼쪽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노은단이 세워지기 전에

성삼문의 둘째 딸이 제사를 지냈고 전해지는 고택이 있는데

그곳은 성삼문 선생의 외손 되는 고택으로 엄찬 고택이라고 한다

그럼 이번에는 성삼문 선생의 외손이 살았던 엄찬고택으로 발을 돌려 본다

 

상리마을 농산물 집하장 - 홍성군 홍북면 상리

 

성삼문 부인 묘소에서 내려와 상리마을로 들어섰을 때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성삼문 외손인 엄찬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엄찬 고택 앞에서 마을 할머니에게 성삼문 부인 묘지가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어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이라면 50년 전도 오래전이고 500년 전도 오래전이다

그 오래 전의 기준이 아주 애매하여 나는 다시 또 조심스럽게 여쭈어 봤다 

 

"아주 오래전이라면 백 년 전에도 있었겠네요?"

"백 년이 뭐여? 오백 년도 더 된 무덤이여"

그 할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렇게 말을 하더니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리 마을 엄찬고택과 최영사당 입구로 향하고 있을 때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차를 마을 입구에 세워놓고 우산을 펼쳐 들고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700~800m 지점에는 최영장군 사당이 있고

곧바로 올라가면 약 100m 지점에 엄찬 고택이 있다

 

성삼문 선생의 외손인 엄찬고택 - 홍북면 노은리

 

내가 이곳을 오르고 있는 도중에도 비는 꾸준하게 내리고 있어

엄찬고택 올라가는 입구는 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그 파여있는 곳으로 빗물이 또랑물 흐르듯 졸졸 흐르고 있었다 

성삼문은 1418년, 바로 이곳 외가댁은 엄찬 고택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성삼문 선생의 외손인 엄찬고택 -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 선생의 외손인 엄찬고택 -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이 38세로 생을 마감하자 시신은 갈기갈기 찢기어 전국으로 흩어지고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형제의 자손들마저 모두 몰살당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제를 올려 줄 사람조차도 없다 

그때 선생의 부인인 신 씨(첫째 부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 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손 되는 사람들이 신주를 넘겨받아 노은리에 단을 쌓고 제사를 내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노은리 방향으로 약 1Km 정도만 가면 성삼문선생 제를 올리는 노은단이 있다  

그 단이 세워지기 전에 성삼문의 둘째 딸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당시 첫째 딸은 박임경과 결혼 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임경은 한양서 출생했는데 황주목사와 숙천도호부사를 지냈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아들 셋을 두었다.

그 아들들은 성삼문의 충절을 추모하여 벼슬에 뜻을 버리고

32세 되던 해 변방으로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성삼문 선생의 외손인 엄찬고택 - 홍북면 노은리

 

이 고택은 성삼문이 죽고 약 200년 후인

1670년대에 지었다고 전하며 지금은 연고가 없는 개인소유라고 한다.

기록에 위하면 1670년대에 이 집에서 약 4~5년간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렸다고 하는데

노은단이 세워지면서 이곳의 위패를 모두 철거시켰다고 한다

또 성삼문의 둘째 딸이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여지기도 하며

이 건물은 훨씬 그 이 전에 지어진 고택이라는 것이다.

성삼문 처형당시 아버지를 비롯하여 형제, 형제의 자손들까지 삼족의 남자들은 모두 몰살당했으니 

핏줄이라고는 부인과 딸들밖에 없었다

그 부인과 딸들도 수양(세조)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신역할을 한 집안에

노비나 종으로 보내졌다가 12년 만에 사면을 받았다.

그때 한양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까?

그때 당시엔 역도로 몰린 집안의 여자들은 노비나 종, 또는 첩으로 삼기도 했었다

 

성삼문 선생이 태어났다는 홍성 엄찬 고택

 

여기 그 증거로 실록에 기록된 사육신의 부인과 딸들의 행적을 그대로 옮겨 본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 그리고 이승로의 누이 아지,

백팽년의 아내 옥금과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 딸 내은금, 첩의 딸 한금

유성원의 아내 미치, 딸 백대... 그리고 이명민의 아내 맹비

유응부의 아내 약비, 그리고 하위지의 아내 귀금과 딸 목금,

이개의 아내 가지, 이윤원의 아내 대비

조완규의 아내 소사와 딸 요문

김문기의 딸 종산, 첩 지장비김문기의 아내 봉비

그리고 성삼문 아버지 성승의 아내 미치 등이 노비로 보내졌다

 

이들이 노비로 보내진 곳은 다음과 같다

운성부원군 박종우, 영의정 정인지, 좌승지 한명회,

그리고 벼슬이 없었던 권반 사대부집의 여인들을 가져갈 수 있었다 

권반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다가

그의 형 권람이 세조반정이라 불리는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울 때

함께 했었다는 이유로 세조 1년에 좌익공신 2등에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대부집 여인들을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단종 복위에 실패했던 집안의 여인들을 취했던 사람들을 계속 열거해 보겠다

지병조사 권언, 우참찬 강맹겸, 판군기감사 김질, 병조판서 신숙주

이중 김질 성삼문과 같이 단종복위를 모의 했지만 도중에 배신했던 인물이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김질도 사대부집 여인들을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사헌 최항, 도절제사 유수, 계림군 이흥상 등이다

이 외에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록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몇 가지만 추려 본 것이다

 

성삼문 선생이 태어났다는 홍성 엄찬 고택

 

성삼문 선생이 태어났다는 외가, 엄찬 고택에서 막 나가려 할 때는

또다시 세찬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고택 대문은 바람에 저 혼자 열였다 닫혔다 

삐걱, 삐이걱 ~~ 스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