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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550년 간 매월당 김시습 기다리는 세조대왕(수양대군)연! 공주 마곡사

by 비단왕 2024. 5. 12.

공주 마곡사 입구에서 내려다 본 마곡사 계곡 설경 - 충남 공주시 사곡면 - 2011년 1월 촬영

 

내가 마곡사에 처음 발길을 들였을 때는 90년대 초반 무렵을 기억된다 

당시는 마곡사 경내로 집입 하는 이 길 양옆으로 음식점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이곳에 있던 가게들은 모두 일주문 밖으로 이주되었고 그 주변의 도로도 포장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요즘도 마곡사로 들어오는 시내버스는 그때나 다름없이 하루 대 여섯 차례 정도만 드나든다

때문에 마곡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기란 쉽지만은 않은 곳이다

 

마곡사 경내를 가로 지르는 마곡사 계곡  - 2011년 1월 촬영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마곡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이 보였다

겨울 계곡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얼음장 아래로 차디찬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곡사 경내를 가로 지르는 마곡사 계곡 - 2011년 1월 촬영

 

마곡사(麻谷寺)란 이름은 예부터 이 지역에 마(麻)가 많이 자라던 골짜기라 하여 

마곡사(麻谷寺)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신라의 자장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스승인 마곡화상을 기려 이 절을 창건하고는 마곡사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여하튼 이 마곡사는 약 500백 년 전부터 성행하던 정감록 십승지지중 하나의 고을로서

공주의 마곡천과 유구천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예부터 나라에 난이 일어나도 화를 입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피난처로 알려졌다는 정감록 십승지지의 땅, 공주 사곡면은

한국 전쟁 때도 병화를 입지 않았던 마을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이 마을에 한 번 들어오려면 깊숙한 골짜기를 수십 번 돌아 들어와야 한다

시내버스도 하루에 너 댓 차례정도밖에 다니지 않는다

 

오백 년 전부터 성행하던 정감록에는 나라에 난이 일어날 때마다 몸을 피할 수 있는 곳

열 곳을 나열해 놓았는데 그중 이곳 마곡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라고...

 

마곡사가 위치해 있는 공주시 사곡면은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십승지지 마을 중 하나인데

이 마을은 지금도 교통은 불편하지만 기름진 들판이 골짜기 사이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라에 난이 일어날 때마다 숨어 들어와 농사짓고 살기에는

아주 적합한 마을로 정감록에 기록을 해 두었던 것이 아닐까? 

 

마곡사 암자 영은암 가는 길

 

기축년 새해, 늘 복되고 좋은날 되시라고 마곡사 스님들께서 걸어놓은 현수막

 

 대한불교 조계종 제6 교구 본사라는 마곡사는 조계종 교구 본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다른 교구 본사 사찰들과는 달리 그리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조계종 교구 본사가 아니라도 요즘 웬만한 사찰들은 최근 들어 엄청난 중창불사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대형 건축물들을 건축하여

본래의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마곡사는 최근 들어 사찰의 전각들을 새로 건축하거나 중창시킨 흔적들이 거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아주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곡사 해탈문(두이문)  - 충남 공주시 사곡면

 

보통 사찰은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금강문, 사천왕문을 지나서 대웅전에 이르게 되는데

마곡사는 일주문을 지나 곧바로 해탈문(불이문)으로 이어진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불이문의 不二란 뜻은

나와 상대하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불법은 둘이 아닌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로 귀의하고 있다는 뜻이 되며

모든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난 참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문이라 하여 해탈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불이(不二)...

이 두 글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만 하면 더 이상 저 해탈문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사찰 초입에 세워져 있는 일주문이 인간세상과 불법세상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문이라면

해탈문(불이문)은 세속의 모든 번민과 고통을 벗어 버리고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돌아올 것을 일깨우게 하는 문이다

 

마곡사 천왕문(天王門)

 

마곡사 천왕문(麻谷寺 天王門)

문화재 자료 제62호

소재지 :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이 전각은 조선시대 후기에 세워진 사천왕문으로 사

찰의 입구에서 해탈문(解脫門)을 거쳐 두 번째로 지나는 대문을 말한다.

사천왕은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4 지역을 관할하는 신격적 존재이다.

이들은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세계의 인간들이 불도(佛道)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천왕문에는 그림이나 조각상(四天王像)이 있다.

 

- 이상 마곡사 안내문판에서 옮겨온 글 -

 

우리나라 전국의 사찰들은 대개 일주문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문이 금강문이다

하지만 금강문이 없는 사찰들도 많다.

금강문이 있는 사찰은 금강문이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지만

마곡사는 해탈문(불이문)이 금강문을 대신한다

금강문을 지나면 이처럼 사천왕문을 거처 본전인 대웅전으로 진입을 할 수 있는데

마곡사는 해탈문 - 사천왕문을 지나면 곧바로 주 전인 대광보전이다

 

마곡사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지장전 또는 명부전이라고 부르는데 마곡사는 현판이 명부전이라고 되어 있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들을 구제하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그리고 무독귀왕 외에 염라대왕 등

10인의 왕을 봉안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적한 후 미륵부처님이 출현할 때까지

육도윤회의 현실세계서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던 보살이다

흔히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고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살로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지장보살은 대원본존이라는 이름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좁은 전각에 지장과 염라가 같이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염라는 세상의 죄인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하지만

지장은 죄인들이 해탈할 때까지 인도하는 일을 한다 

이렇게 염라가 아무리 죄인들을 잡아들이면 뭐 해? 

지장이 다 풀어 주는데,,,

지장과 염라,,,

이렇게 맡은바 임무가 정반대이고

또 늘 같이 붙어 다니는데 싸우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명부전(冥府殿) 현판

 

마곡사 영산전 (靈山殿)

 

보물 제800호

소재지 :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이 전각은 마곡사에 있는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51년(효종 2년)에 각순대사(覺淳 大師)가 다시 세웠다.

내부에 7분의 여래불상과 1,000분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어 일명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한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간결한 맞배지붕이 건물을 채색한 단청과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훌륭한 전통 목조 건물이다.

현액(顯額)은 조선 세조가 이곳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전한다.

 

- 이상 마곡사 영산전 안내문판에서 옮겨온 글 -

그러니까 저 영산전(靈山殿)이란 현판은 조선의 7대 임금 세조(1417~1468)가

김시습을 만나러 마곡사에 행차했을 때 직접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 현판이다

당시 김시습은 강원도와 평안도를 떠돌아다니다 경기도를 거처

이곳 충청도 깊숙한 산골마을 공주 마곡사로 들어왔다.

그때 세조는 김시습이 마곡사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행차를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시습은 세가 자신을 만나러 온 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마곡사를 떠났다

며칠 후 세조가 공주 마곡사에 당도했었지만 김시습은 이미 마곡사를 떠난 뒤였다

이때 세조(수양대군)는 이곳 마곡사의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현판을 직접 쓰고는

"김시습이 나를 버리고 떠났으니 연을 타고 갈 수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때 세조(수양대군)가 이곳 마곡사에 흔적을 남겨놓고 간 것이 저 영산전이라는 현판과

한양에서 올 때 타고 내려온 세조대왕 연(조선시대 임금이 타던 가마)이다

당시 세조대왕이 타고 왔던 연은 마곡사 대광보전에 보관되어 있다

 

세조가 직접 썼다는 영산전 (靈山殿) 현액 -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

 

영산전 바로 앞에 있는 요사체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세조(당시 수양대군)는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

즉위 2년 만에 병사하고 12세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권람 등 측근 참모들과 계유정난이라는 난을 일으켜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내고

왕권을 찬탈했던 장본인이었다

 

김시습은 당시 세조가 친형인 문종의 아들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 다음

사약을 내려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또 집현전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등 사육신들을

처참하게 차열형(팔과 다리를 마차에 묽은 다음 사지를 찢어 죽게 하는 형벌)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에 참여했던 사육신과 충신들은 차열형을 받으면서

몸의 일부분은 한강의 남쪽에 떨어져 있었고 또 다른 일부분은 한강의 북쪽에 떨어져 있었을 때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고

그때 그 찢어진 시신들을 새벽 시간을 틈타 몰래 수습하여

노량진 부근에 묻었던 장본인도 바로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그 당시 세조에 위하여 차열형이라는 상상하기 조차 힘든 형을 당하며 

처참한 최후를 마쳤던 사육신들의 모습을 그때까지 결코 잊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세조는 그 당시 사육신들의 시신들을 몰래 거두었던

그... 김시습이 그리워 공주 마곡사로 세조대왕 연을 타고 그를 찾으러 온 것이다

하지만 김시습은 세조가 자신을 만나러 이곳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바로 매멸차게 마곡사를 떠나 버렸다

 

그때 세조는 이렇게 한탄하며 마곡사를 떠났다

"김시습이 나를 버리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

그리하여 한양에서 타고 왔던 가마를 이곳 마곡사에 내 버려두고

대신 소를 타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마곡사 기록에 위하여 전하여지고 있다

당시 세조(1417~1468)가 타고 왔던 세조대왕 연이 아직도 이곳 마곡사에서 김시습을 기다리고 있지만

한번 떠났던 김시습 5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550년 동안 마곡사에서 김시습을 기다리고 있는 세조대왕 연

 

저 세조대왕 연(조선시대 임금이 타고 다녔던 가마)은 마곡사 대광보전에 보관되어 있지만

스님들 공부하시는데 함부로 촬영을 할 수가 없어 공주시 문화 관광과에서 잠시 빌려온 사진이다

 

당시 세조가 버려두고 간 세조대왕 가마가 보관되어 있다는 마곡사 대광보전

 

당시 세조가 버려 두고 간 세조대왕 가마가 보관되어 있다는 마곡사 대광보전

 

대광보전 앞을 흐르는 마곡사 계곡

 

대광보전 앞을 흐르는 마곡사 계곡

 

대웅보전  앞에서 내려다본 심검당(尋劍堂)왼쪽...과  대광보전 (大光寶殿)...오른쪽

 

왼쪽 심검당은 스님들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사용하거나 신도들이 거처하는 방이고

오른쪽 대광보전은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 주 전을 이루고 있는 전각이다

대웅보전은 지금 내가 서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자리가 대웅보전인데

대웅보전, 대광보전, 심검당, 응진전... 그리고 김구 선생이 응진전 앞에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