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도계역 부근에 있는 24시 슈퍼,,,
슈퍼에서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고 나오다 보니
웬 냐옹이 한 마리가 으르렁 거리며 노려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표정을 가만히 보니 마치 지가 무슨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박에다 줄 몇 개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는 없는 뱁
네가 아무리 으르렁 거리며 노려봐야 너는 도계만자로의 냐옹이일 뿐이다
알긋냐? 잔챙아?
휴대폰 배터리 충전을 마치고 전두 시장 뒤로 한번 와봤다
이것이 이른바 까치발 집이라고 했던가?
이 하천의 오른쪽은 전두시장,,
이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십천변 까치발 집들이 왠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마치 태백 철암동의 개천옆에 세워진 건물들과 모양이 흡사하다
이곳도 철암과 마찬가지로 집을 지을만한 공간이 협소하여 개천옆에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세웠나 보다
도계읍 전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물난리를 겪으면서 산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장마철만 되면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상습 수해지역이라고 한다
도계 전두시장은 이 부근에서 동해시 북평장과 태백 통리장에 이어 장이 크게 열리는 시장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1900년대 초반,
그러니까 한일 합병이 되던 무렵에는 면 소재지였던 신기면 신기시장에서 장이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 전쟁을 치르면서 1950년대 초,
청사와 시장도 이곳으로 옮겨지고 그 후 도계탄광지역의 중심상권 역할을 해오면서
지금 현재의 전두시장으로 성장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도계탄광 개발로 도계지역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60년대 중반부터 도계 5일장이 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도계장날은 끝자리가 4, 9일이다
동해시, 삼척시가 지척에 있다 보니 해산물 하나는 싱싱하여
당시 이곳 탄광지역의 거의 모든 곳에 공급을 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80년대 후반부터 세차게 몰아닥친 석탄산업의 사양화로 도계읍은 인구 2만도 채 안 되는 작은 읍으로 전락했지만
현재도 장날만 되면 해산물 시장은 여전히 크게 서는 편이다
도계는 일제강점기 때 무연탄 광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그 당시 묵호에서 도계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다고 하는데
그때 도계 인구는 불과 7천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한참 광산경기가 호황기였을 때는 인구가 5만에 가까웠다가
90년대 들어서면서 석탄 생산은 하향길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거의 폐광 상태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인구도 2만이 채 못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삼척시내 방향으로 약 10분 정도만 달리면 고사리역이다
도계역을 지난 영동선 무궁화호 기차가
눈을 불도저처럼 밀어가며 약 7~8분 정도 달리자 고사리역이 보였다
고사리역은 07년도 하절기부터 기차표 판매가 전면 중단...
지금 현재까지 약 15년여 동안 모든 여객열차가 이렇게 무정차로 통과한다
이렇게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기차를 타면 아득히 잊혀졌던 사람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그 사람이 이름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있네 ~
누가 만든 가사인지 지금 읊조려 보니 차암 기막힌 가사네
하긴... 나도 한때 그런 적은 있었지
우리 같이 바퀴벌레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날
냉장고 뒤에서 오손도손
카스테라 빵부스러기라도 핥아먹으며 행복했겠지...
그대가 진주성 논개로 태어났으면
나는 왜놈 장수, 게야무라 후미스케로 태어나
둘이 끌어안고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우리같이 한 몸이 될 수도 있었겠지...
한데 지금은 박인환의 이야기처럼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있네...
다 좋은데 마지막 구절...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있네
이 구절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한데 일부의 바람둥이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분명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그동안 이 여자 저 여자 마구 만나 모텔 많이 들락거려 봐서 아는데
시 구절에 눈동자라든지 입술이라든지... 이런 단어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분명 여자를 만나면 본능적인 욕망을 못 이겨 무조건 모텔 가서 옷부터 홀딱 벗을 것이다
그리고는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입술, 그 몸뚱이는 생각난다,,,라고 ,,,
도계역을 출발한 강릉행 무궁화호 기차는 고사리역과 하고사리역,
그리고 마차리역을 무정차로 통과, 신기역으로 들어선다
이곳 역 주변으로는 삼척-도계 간 국도가 지나고
국도변으로는 환선굴과 대이리 굴피마을, 강원종합 박물관 등이 있으니
구경하실 분은 여기서 하차들 하십시오!
신기역을 출발한 기차가 오십천변을 따라 7~8분 정도 달려오니 상정역이었다
상정역 주변으론 슬레이트지붕, 양철지붕의 농가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며 눈 발은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이곳 상정역도 영동선 무궁화호 기차는 무정차로 통과,,,
고사리역은 07년도 하절기부터, 그리고 미로역은 08년부터 기차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1939년에 건립된 도경리역은 영동선에 남아있는 역사 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로서 그 회소 가치가 크다고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함.
묵호 중앙시장
묵호항 수산시장
묵호항 수산시장
80~90년 대의 묵호항
당시는 명주군이라 불렸던가?
여하튼 이 항구로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자들은 바람의 언덕에 자리 잡고 살면서 새벽이면 항구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오징어 배를 갈랐다
항구앞 바람의 언덕,
가파르고 비좁은 골은 길은 오징어로 가득했다
집 마당은 물론 빨랫줄에도 오징어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남자들은 항구에서 오징어 배를 탔고 또 석탄과 시멘트 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새벽부터 항구에서 오징어 배를 갈랐다
바람의 언덕
바람 앞에 내어 준 삶
아비와 남편을 삼킨 바람은
다시 묵호 언덕으로 불어와
꾸들꾸들 오징어 명태를 말린다
남은 이들을 살려낸다
그들은 바람이며 삶이며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간절한 바람이다
강릉 출신 작가 심상대 씨는 묵호를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이 남편을 집어 삼키면
아들이 바다에 나갔고
아들마저 집어 삼키면 여자는 항구로 나가 오징어 배를 갈랐고,,,,
80~90년대의 묵호를 가리켜 술과 바람의 도시
또는 한 잔의 소주와도 같은 바다라고 표현한 작가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소설가 심상대 씨였다
이런 표현들이 나온 배경은 당시 묵호 앞바다를 고향으로 둔 젊은이들이
그 소주와도 같은 바다를 떠나 인간의 바다인 대도시로 갔다가
상처만 받고 돌아온 데서 비롯된 말이지 않을까 싶다
온갖 욕망과 애욕과 이기심이 들끓는 인간의 바다인 대도시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또 고향인 묵호에 다시 돌아와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영혼들,,,
그 상처받은 영혼들이 귀향을 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을 하게 된 이유는
작가 심상대 씨가 이야기하는 소주와도 같은 바다는
이미 묵호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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