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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이야기

예산 5일장 고덕장날, 윤봉길 의사 기념관 갔더니 내포보부상촌 어디?

by 비단왕 2024. 2. 9.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첫눈 내린 날, 예산 오일장 고덕 장날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오전, 첫눈 내린 날, 예산 오일장 고덕 장날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오전, 첫눈 내린 날, 예산 5일장 고덕 장날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예산 5일장 고덕 장날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예산 5일장 고덕 장날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예산 오일장 고덕 장날 

조선초

예산 덕산, 고덕은 서해안지역 해산물과 내포평야의 농산물을 등짐과 봇짐에 둘러메고

이장, 저장, 그장, 요장으로 떠돌아다니던 보부상들이 일찍부터 발달되어 왔던 시장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조선 초부터 보부상들을 총 관할하는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가야산 서쪽 지방인 서산, 해미와 가야산 동쪽 지방인

예산, 덕산, 고덕, 홍성을 연결시켜 주는 장터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다고 하네요

 

보부상(褓負商)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써

장날 각종 생필품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팔았고 지역 간 통신사 역할까지 해 왔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들 조직 내부에선 금지조항으로 4 계명
(망언, 행패, 음란, 도둑질)을 철저히 지켜가며 자신들만의 위계질서로 엄히 다스려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덕상무사와 보부상들은 일제의 한일합병과 함께 강제 해산된 후

지금 현재까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고려말부터 보부상 조직으로 700년간의 맥을 이어온 충남 예산, 고덕, 덕산의 예덕상무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보부상의 근거지로서 국가 중요 민속자료 3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예덕 상무사 보부상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보부상 사진

위에 사진 - 마지막 장돌림 유진룡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기가 시작된 지 여섯 해인 1916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난 유진룡은

아버지의 방탕으로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아이보개로부터 머슴으로 이어지는 고용살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스물네 살에 비로소 고용살이를 끝내고 충청남도 북쪽의 여러 장터를 돌면서 어물장사를 했는데

강제로 끌려가 3년간 일본 홋카이도와 시코쿠의 광산에서 징용살이를 빼놓고는

죽는 날까지 시장과 더불어 살았다.

 

1946년 어물행상을 그만두고 덕산장에서 장세를 걷는 일을 시작하고

덕산면 읍내리에 당진집이라는 사발 막걸릿집을 낸다.

예순다섯에 비로소 예덕상무사의 우두머리인 접장을 지냈으며

1989년 일흔네 살의 일기로 당진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일찍이 예덕상무사에 몸담아서 보부상단의 훌륭한 정신을 다음세대에 잇고자

노력하였지만 허사였다.

마지막 장돌림 유진룡을 통해 옛 보부상들이 펼쳤던 여러 행적, 도덕과 윤리, 애환과 생리,

그리고 보부상의 유품들이 그나마 그를 통해 전해질 수 있었다.

 

아래사진 - 예덕상무사의 두령 윤규상(尹圭相) 

예덕 상무사 두령을 역임하고 있다는 윤규상은 마지막 보부상 윤진룡의 아들로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예산 덕산에서 예덕상무사 두령을 역임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비단 왕도 잘 모르겠네요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첫눈 내린 날, 윤봉길 의사 사당 덕산 충의사

 

예산 덕산, 고덕 등, 내포지방은 윤봉길 의사 말고도 성삼문 유허지가 있고 최영 장군 사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생가, 만공스님이 입적한 수덕사,

김대건 신부, 김좌진 장군 생가, 추사 김정희 고택 등, 

그야말로 기골이 장대한 한 깡다구의 소유자들이 수없이 많이 살다 간 범상치 않은 생가들이 많죠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첫눈 내린 날,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예산에서 삽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도로 옆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는데요 

바로 이곳에서부터 내포평야가 시작되어 홍성까지, 

그리고 가야산을 넘어 서산, 해미, 면천까지 쭉 어어져 있죠 

내포지방은 예부터 논동사와 과일, 등이 잘 될 뿐 아니라 안면도와 천수만의 조기잡이, 소금, 

그리고 서산 간월도와 홍성 결성의 조개, 굴 등,,,,

기름지고 넓은 농토와 풍부한 해산물들을 고루 생산할 수 있어

예부터 풍요롭고 인심이 넉넉한 마을이었습니다 

 

이렇게 풍요롭고 넉넉한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씨도

내포평야처럼 넉넉하고 온화하기만 한데요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느릿하고 밋밋한 충청도 특유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질 수 있는 깡다구 센 사람들이 살다 간 곳이기도 합니다 

 

성삼문 유허지도 이곳에서 약 12Km 떨어진 홍성군 홍북면에 있고

고려 말, 원나라를 몰아냈던 최영 장군 사당도 성삼문과 같은 홍성군 홍북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생가와 김좌진 장군 생가도 그 부근에 자리하고 있죠 

 

덕산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안내 표지판
윤봉길 의사 기념관 운영시간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첫눈 내린 날, 윤봉길 의사  기념관

 

예산 오일장 고덕 장날,

장터 한 바퀴 돌아보고 삽교로 가는 길에 덕산 윤봉길 기념관을 잠시 들려 보았네요 

그런데 바로 이 길 옆에 내포보부상촌 예덕상무사 유물 전시관이 있었는데요 

이날 와 보니 전시관은 어디로 갔는지 그 흔적은 오리무중이고 

그 유물 전시관은 관리 사무소로 쓰고 있었습니다 

 

이곳 충의사에는 윤봉길의사 기념관 말고도 예덕상무사 유물전시관이 있었는데요 

예덕 상무사는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당진, 면천, 지역까지

장사업무를 맡아 주관했던 보부상 조직과 기능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이었죠 

 

예전에 내포보부상촌 예덕 상무사 유물 전시관에서 촬영해 온 사진들이

오래전 폰카로 촬영했기 때문에 지금도 화질이 흐릿,,,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찍어 보려 했더니 헐 ~~~ 사라졌네요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예산군 덕산면

 

일단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더니 손바닥 대면 영상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손바닥을 살짝 댔죠 

그랬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네요 

조금 기다렸지만 영상이 나오지 않아 그냥 패스,,,

다음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윤봉길 의사 연보

 

윤봉길 의사의 동상은 충의사 말고도 이곳에서 약 2~3Km 정도 떨어진

덕산 장터 앞, 덕산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세워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사용하던 유품 - 놋 양푼, 사기 그릇, 주발, 대접, 놋대야
윤봉길 의사가 사용하던 유품 - 놋양푼
윤봉길 의사가 지은 한시를 모은 시집
윤봉길 의사가 지은 한시를 모은 시집
윤봉길 의사 발자취 - 노란색 망명, 초록색 수감 호송, 파란색 유해 송환
윤봉길 의사가 김구와 최후로 작별할 때 정표로 바꾸어 가졌다는 회중 시계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할 대 사용한 도시락 물통 폭판
윤의사가 자필로 쓴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문

 

이곳에서는 윤봉길 의사 유품들과 농촌 부흥운동 장면, 

상해에서 폭탄투적 장면, 총살형 장면 등을 생생한 영상으로 재현하여 상영하고 있습니다 

 

거록한 순국 - 윤봉길 의사 기념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일제 군법회의 사형 판결문
윤 의사 유해 발굴과 국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다 - 윤봉길 의사 기념과
일제 강점기 광복군 총사령부
1932년 4월 29일, 의거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순국
덕산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가져온 예산 상설시장 국밥거리 백종원

예산 상설 시장에서 퇴출당했다고 하던 백종원이 다시 예산으로 돌아왔네요 

요즘은 백종원이 다시 예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