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08년 8월에 촬영된 사진들임을 알려드립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비는 내리는데 ~~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비는 내리는데 ~~
대중가요가수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 가사처럼
그 옛날 인적 없던 산길 백리 수덕사에 사연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나는 수덕사 수덕여관을 들어설 때마다 언제나 두 여인을 떠올리곤 한다
한분은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김일엽 스님이고
또 한 분은 수덕여관에 머물렀던 신여성 여류화가 나혜석이다
수덕사 환희대(歡喜臺)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김일엽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고
매표소 앞을 지나 왼쪽에 자리 잡은 수덕여관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의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다
나혜석과 김일엽은 1896년생으로 같은 시대에 태어났고
또 김일엽이 출가했을 당시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이혼의 상흔을 달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럼 먼저 저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수덕여관에 들어가 보겠다
수덕여관에 들어섰을 때도 비는 꾸준하게 내리고 있었으며 여관의 모습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었다
허물어져 가던 예전의 수덕여관을 걷어내고 새로운 수덕여관이 조성되었는데
그래도 모양은 예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소성해 놓았다
이곳이 바로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 화백이 1944년에 구입하여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여류화가 나혜석은 이응로 화백이 이 여관을 구입하기 전부터 잠시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작품활동을 하려고 머물다 간 것이 아니라 당시 수덕사로 출가한 친구인
김일엽을 찾아 들어왔던 것이고 또 이혼의 상흔을 달래며 수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1896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김일엽은 이화 여전에서 공부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신여성이었고 그도 나혜석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33세 때인 1928년에 불가에 들었다
그 후, 년 만공스님을 만나 38세의 나이로
수덕사의 견성암(지금의 환희대)에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그 당시 이곳 환희대에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친구 일엽을 찾아온 신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일본 유학 후 부유한 집안의 남편과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 후 파리에 머물며 그림 공부를 하던 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파경을 맞았다
이후 수도승이 되려고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 공 선사로부터 중이 될 재목이 되지 못한다 하여
허락을 얻지 못하고 일주문 옆 수덕여관에 수년간 머물며 떠돌아다니다
결국,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청년 화가였던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 화백은 선배 화가를 만나기 위해
수덕여관을 드나들면서 나혜석과도 우정을 쌓았다.
이응로 화백은 1904년생이니 나혜석 보다는 8년 후배였던 것이다
그 후, 이응로 화백은 해방이 되기 바로 전 해인
1944년에 이 수덕여관을 구입하여 이곳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은 본 부인 박귀희를 두고 젊은 후배화가와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응로 화백은 65세가 되던 해인
1969년에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2년간 교도소 수감생활 하게 되었다.
그때 본 부인 박귀희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모든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은 교도소 출감 후, 또다시 파리로 떠났는데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내인 박귀희는 이제나 저제나 남편 오기를 학수고대하다 그만 세상을 떠났다
여하튼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구입하기 전부터 나혜석이 친구인 일엽을 찾아와
몇 년간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한데 당시 일엽의 눈으로 봤던 나혜석은 누구였을까?
1980년 문학창조사에서 발행한 "아껴 무엇하리 이 청춘을,,," 이란 에세이집에 보면
김일엽이 나혜석에 대하여 이야기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다.
16절지로 약 7페이지 분량 정도 되는데 그중 몇 부분만 여기에 옮겨볼까 한다
"아껴 무엇하리 이 청춘을" 이란 책에 실려있는 나혜석 이야기
나혜석! 그는 누구인가"
한국 여성의 첫 선각
김일엽(金一葉, 시인. 여승)
한국의 여자 교육사를 나는 모른다.
다만 근대사로는 70년 전부터이다.
내가 알기는 내가 학교에 다니던 그 옛날 60년 동안의 일을 기억할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40여 년 전에 비로소 여인들이 사회적으로 등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등단한 여인이 나혜석인가 한다.
나 씨는 과연 그때 여인으로서는 잘났던 것이다.
인물로나 재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자로서 동경을 유학한 것도 나 씨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하 생략하고...
나 씨는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미소년의 미대생 최승구(당년 19세)와 지극히 열렬한 사랑에 빠졌지만
그 미소년은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울부짖던 나 씨는 타는 가슴을 견딜 수가 없었던지 자신을 순정적으로 따르던
제대(현 서울대) 재학 중인 김우영이라는 청년과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약혼 후에도 나 씨는 이광수(李光洙)란 천재 청년도 사귀었던 것이다.
이광수는 나 씨와 친한 허영숙이라는 재색을 겸한 의과대학생도 사랑하였다.
아마 이왕 사귄 나 씨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하 생략...
그때 나 씨는 나를 찾아 수덕사 견성암으로 와서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잘났던 여인인 나혜석!
미의 화신으로 남자들의 환영에 둘러싸였던 나혜석!
최초의 여류화가로 그렇게 여류 사회를 빛내던 나혜석!
그 여인이 자기를 사랑의 고개 너머 상상봉까지 추켜올려 주던
그 사회에서 밀려나서 산중으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 나 씨는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모되었던 것이다.
서글서글하고 밝은 그 눈의 동공은 빙글빙글 돌고
꿋꿋하던 몸은 떨리어 지탱해 가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이혼을 당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 보았으나 법적으로 이혼을 당하게 되고
남편의 정은 정반대로 돌아갔으니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던 남편의 눈은 부라리는 원수의 눈으로 돌변하여
기름과 피를 짜서 기른 4남매를 마지막 이별의 손목 한번 못 만져 보게 하고
알몸으로 밀어내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이하 생략하고...
누구의 주선이었던지 승방에서 나가게 된 후에는 어떤 양로원에 수용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살로서 말로를 마치었다는 말도 있으나 산중에 묻힌 나로서는 자세한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이하 생략...
여기서 끊어진 이야기를 마저 이어 보겠다
김말봉(김팔봉) 작가가 말하는 일엽스님 이야기,,,
H 씨는 중학교 직원이었지만 승려출신이고 보니 자녀가 있을 리 없다.
비둘기같이 살고 있는 가정이었다.
이 댁에도 놀러 간 일이 있지만 이때에도 김여사는 내연성의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그 후 왠지 H 씨와 이별한 뒤에 김여사의 종적을 몰랐었는데,
어느 해 들으니 여사는 입산수도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벌써 삼십여 년 전인가 보다.
그때 김여사와 함께 나혜석 여사의 입산 소식이 전하여 지자
여러 사람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간 김여사는 그의 수상록을 세상에 보냈다.
생각건대, 사람이 자기를 불사를 만한 대용이 없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크게, 깊게 그리고 영원히 살지 못하리라.
김여사는 마침내 육신의 청춘을 불사름으로써 영원한 청춘을 찾았다고 나는 믿는다.
이상 김말봉(김팡봉)이 본 일엽스님 이야기였음
1980년 문학 창조사 초판 발행본에 소개된 김말봉(김팔봉)씨 약력
한국 최초의 여성 장로(長老). 소설가. 1901년 음력 4월 3일 부산 출생.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박순천 여사와 동창)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 황해도 명신학교 교사로 재직 후
일본에 유학하여 1927년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 졸.
이때 시인 정지용과 함께 수학.
1929년 중앙일보 기자. 1933년에 중앙일보(구) 신춘문예 단편 망명녀(亡命女)가 당선 문단 데뷔
이하 생략
그러니까 나혜석은 친구인 김일엽을 따라 수덕사에 입산은 했었지만
산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산문을 뛰쳐나갔다가 어느 양로원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소식이 잠잠하다가 결국 어느 무연고 병동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나혜석이나 일엽스님은 근대 서양화가나 여류문학도 이기도 했었고
개화기의 여성운동가였으며 출가 수도자이기도 했다
한데 세간 사람들의 눈에는 일엽스님의 모습이 송춘희의 유행가 가사처럼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
아아아아 ~
수덕사에 ~~ 쇠북이 운다 ~~
이런 식으로 속세에서의 사랑 행각이 실패로 돌아가자 산길 백리 수덕사로 찾아와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고는 유행가 가사 대로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우는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 여전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
불가에 입문하게 된 것도 예사롭지 않는데 두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자유분방한 연애론을 주장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는 불같은 사랑을 했다는 것을 보면
그런 오해는 충분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동경 유학이라는 타이틀과 또 사회적으로도 저명한 인사들과 사귀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은 세간사람들의 술상에서
안주거리로 자주 오르내리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당시 여자로서 겪어야 되는 험난한 길을 잘 견디어 내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수도승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그러면 수덕여관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김일엽,
그리고 김일엽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고 이야기를 끝낼까 한다
일엽스님이 수덕사 견성암(환희대)에 있을 때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는 어머니라 부르자
자신은 이미 출가한 몸이니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그냥 스님이라 부르라면서 냉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자식이 바다 멀리 타국에서 찾아와 어머니라 부르는데 아무리 출가 수도승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 어느 어머니인들 마음이 편했겠는가?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어도 뒤돌아서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수도승이라고는 하지만 수도자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가?
수도승도 엄밀히 따지자면 수도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당시 그 아들은 14살이었다고 하는데 돌아서는 아들을 위로해 준 사람도 다름 아닌
수덕여관에 머물던 김일엽의 친구 나혜석이었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최근 자신의 회고록을 책으로 엮은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당시 일엽의 아들도 나혜석처럼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현재는 70의 나이로 불가에 귀의하여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만공스님도 정읍 태인 사람으로서
13세 되던 해 부친이 돌아 가시자 어머니가 머리 깎고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
만공스님도 어머니를 따라 중이 되었고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도 말년에 어머니를 따라 중이 되었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두 분의 살아온 한 생애가 너무나 닮아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낡은 수덕여관을 몽땅 헐어 버리고 새로 단장을 하더니
이제 스님들 작품 전시실로도 이용되고 있었다.
이곳 스님들 작품 전시실은 "촬영을 금 합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어 촬영을 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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