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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조선불교의 자존심, 예산 수덕사 정혜사(능인선원)를 가다!(덕숭산 만공스님 선방)

by 비단왕 2024. 9. 25.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08년도 여름이던가?

여하튼 당시 8월 말.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던 날

나는 예산, 덕산시장에 갔다가 내친 길에 덕숭산 수덕사까지 간 적이 있었죠

비 오는 날 정혜사(능인선원) 선방까지 올라가는 길은 한적해서 좋았습니다

우산 쓰고 수덕사 입구의 수덕여관에 들렸다가 견성암과 대웅전을 지나

덕숭산 꼭대기의 정혜사(능인선원)까지 올라갔었죠

그중 그때 올리지 못했던 수덕사 정혜사(능인선원)와 금선대 사진을 이번에 올려 보았습니다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고 지나고 수덕여관을 지나고 있을 때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예산 수덕사 금강문

 

일주문에서 300~400m 정도를 걸어오니 금강문이다.

저 금강문 좌우로는 금강역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머뭇거리지 말고 신속히 통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 금강역사들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덕숭산 수덕사 사천왕문

 

역사들이 이두박근 삼두박근 근육을 움찔 거리며 째려보고 있는 금강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이제 고비는 다 넘겼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천왕문이 보인다

사천왕문은 좀 전에 지나왔던 금강문의 역사들보다도 더 험악한 인상의 사천왕들이

방망이, 용, 비파, 장칼 같은 무기를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째려보고 있는 곳이다  

 

눈을 부릅뜨고 불심검문하고 있는 사천왕문의 천왕들,, 증장천왕, 광목천왕 

이 앞으로는 지국천왕과 다문천왕이 있다 

 

덕숭산 수덕사 대웅전

 

사천왕문을 지나면 덕숭총림이란 관문을 나오고 곧바로 대웅전이다.

수덕사 대웅전에 올라갔을 때는 잠시 비가 그쳤다가

만공스님 수도 했다는 정혜사 금선대로 오르고 있을 때는 또다시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 덕사 대웅전에서 능인선원(정혜사)으로 오르는 등산로

 

대웅전에서 서쪽 방향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이렇게 계곡길을 타고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는데 

여기서부터 1천2백 개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송만공 스님이 있었던 능인선원(정혜사)이 나온다

 

능인선원(정혜사)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만난 소림초당

 

저 소림초당은 능인선원(정혜사)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만공스님이 1920년 대에 손수 세운 초당으로 100년 전 모습 그대로이다

 

만공스님이 세웠다는 미륵불

 

만공스님의 스승인 경허스님은 시를 잘 썼고 만공스님은 돌을 잘 깎았다

내가 송만공 스님이 세운 미륵불을 처음 보았을 때가 중학교 수학여행 때의 일이었던 것으기억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송춘희의 노래 가사대로 인적 없는 산 길 백리 수덕사 길이었다

당시엔 덕산면에서 덕숭산 수덕사로 가는 길은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비좁은 비포장 산 길었다 

수학여행 버스가 산을 오르는 동안 힘에 부쳐 으악 ~ 으악 ~ 연신 비명을 지르며 올라가곤 했었다

흙먼지 펄펄 날리며 올라온 그때의 수덕사는 왜 그리 고즈넉하고 호탕하게 보였는지.

지나는 산 길에서 정혜사라고 불리는 능인선원이란 선방도 본 기억이 있었지만

그곳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재작년, 어떤 인연이 있어 찾아가게 되었는데 30년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현대식으로 건축한 건축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곳은 동안거와 하안거를 치르는 비구들이 안거철만 되면 찾아오는 곳인데

내가 갔던 그날은 아직도 하안거 중이라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 거려 봤지만 통제를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일반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능인선원(정혜사) 앞에 세워진 만공탑

 

만공탑에서 능인선원(정혜사)으로 가는 석문

 

만공탑에서 능인선원(정혜사) 으로 가는 석문

 

만공스님이 선원장으로 있었던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

 

저곳은 비구들이 동안거나 하안거를 하는 선방인데 100일 동안 밤낮없이 용맹정진을 하는 동안에는

일체 면회도 안 되고 외부음식 반입도 안 되며 T.V. 라디오, 신문, 잡지책 등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 곳이다.

인간세상으로 치자면 영창이나 유치장과 다름없는 곳이라고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 듯싶다

저 능인선원 바로 아래쪽으로는 금선대라는 자그마한 암자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데

만공스님은 그곳에서 많은 후학도들을 배출시켰다고 한다

 

만공스님이 선원장으로 있었던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 경내

 

이곳은 만공선사가 많은 후학도들을 배출시켰다는 수덕사 선방 정혜사(능인선원) 경내 모습이다 

최근에 많은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건축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칼큼한 모습들이다

 

정혜사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향적당

 

향적당은 원주실이 자리 잡고 있는 수덕사 부속건물인데 이것도 최근에 세워진 건물이다

 

정혜사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향적당

 

능인선원(정혜사)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금선대

 

능인선원(정혜사) 바로 아래쪽에 있는 덕숭산 금선대

 

정혜사(능인선원)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금선대(金仙臺)는

1905년 만공스님이 손수 세웠다는 암자이다 

만공스님 자신이 조실로 쓰면서 많은 후학도들을 탄생시킨 곳이라고 한다  

저 암자에는 초상화 세 개가 걸려 있는데 가운데엔 경허스님, 오른쪽엔 만공스님,

그리고 왼쪽엔 수월스님이던가... 하는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저곳은 일반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장소였는데

재작년 안거 때 어떻게 인연이 되어 들어가서 참배를 한 적이 있었다

 

금선대에 걸려있는 만공스님의 스승 경허선사 초상

 

나는 경허스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경허스님이 해인사 조실스님을 하면서 51세부터 56세까지

5년 동안 머물렀다던 해인사 퇴설당에 한 차례 다녀와 본 것하고

수덕사 능인선원 바로 아래 만공스님이 살다 간 조촐한 산채에서 보았던 경허스님, 만공스님,

그리고 수월스님이었던가...? 의 초상화를 봤었던 것 이것이 내가 아는 경허스님의 전부이다

 

그리고 들었던 이야기로는 1849년생이라는 것과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여

그 후로 공주 동학사에서 경학을 배워 20대 초반에 강사가 되었다는 것

40대 중반에는 동래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51세부터는 해인사 조실이 되어

멸종되어 가던 조선시대의 선맥을 끝까지 유지시켜 온 인물이라는 것

선천적으로 대시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즉흥적이면서도 뛰어난 풍류시인인 동시에 당대의 선승이라는 것...

그리고 해인사 조실생활을 하면서 범어사에 잠시 머물다

다시 해인사로 가는 도중 그 누구에게도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불쑥 해인사의 퇴설당을 떠났다는 것

그 후로는 아무도 경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세월이 한 참 흐른 뒤 그의 제자 수월스님이 어떻게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함경도 개마고원,,, 그것도 개마고원중에 2,000m가 넘는 험한 산들이 첩첩하게 겹쳐진

삼수갑산의 웅이방에서 승려의 모습이 아닌 일반 유생의 모습으로

7년여 동안 산골 오지마을 아이들에게 글이나 가르치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내가 들었던 경허스님의 전부이다   

그렇다면 함경도 삼수, 갑산의 웅이방은 어떤 곳일까?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함경도 삼수, 갑산,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1974년 한국문학 발표, 80년대 초 T.V문학관으로 방영)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지역은 예로부터 하늘을 나는 새조차 찾지 않는다는

산간벽지인 동시에 악명 높은 유배지로 로 알려져 왔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주 최악의 상황으로 진퇴양난에 처해 있을 때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 하고나 보자는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 먹고나 보자 등등,,,

그러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하고나 죽자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함경도 삼수, 갑산,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1920년대 함경남도 무진 대홍수로 인하여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개마고원으로 이주하고 있는 장면

(1974년  한국문학 발표, 80년대 초 T.V문학관으로 방영)

삼수갑산은 물이 맑고 산이 깊어 호랑이를 비롯한 온갖 산짐승들과

송이를 비롯한 귀한 약재들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대에 속하고 눈도 무지막지하게 쌓여

겨울에는 평균기온 영하 20도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함경도 출신 이정호 작가의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 감자 수확하는 장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감자나 옥수수 같은 것을 주식으로 하고

쌀과 같은 것은 여간해서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삼수(三水)나 갑산(甲山)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감자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한다 

 

함경도 출신 여류작가  이정호의 개마고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 "감비 천불붙이" - 감자 수확하는 장면

80년대 초, T.V문학관으로 소개된 함경도 개마고원의 "감비 천불붙이" 

 

삼수갑산의 처녀들도 어려서부터 감자를 캐고 찧고 빻고 깎고 쪄먹느라

감자 다루는 솜씨는 이골이 났다 해서 일 잘하는 사람들을 비유하여

삼수갑산 큰 애기들 자주감자 굴리듯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이렇듯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식량도 궁핍한 데다

매우 춥고 교통도 불편하지만 심산유곡과 푸른 내(川)가 어우러져 있는 마을이라

풍광이 빼어나고 산수가 수려하여 한 번 들어가면

번잡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싫을 정도라 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그 지역에는 절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는 곳도 없었고

또 이렇다 할 사찰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년에 경허가 더욱 선택하게 된 곳이 삼수와 갑산이었을까?

 

경허의 수제자 만공은 스승 경허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웅이방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 통곡을 하고는 다음과 같은 추모송을 읊었다 한다

 

善惡過虎佛이여 是鏡虛禪師로다(선악과 호불이여 시경허선사 로다)

向什摩處去요 醉臥花中睡로다(향십마허거요 취와화중수로다)

 사납긴 범보다 더하고 착함은 부처를 넘는다

이것이 경허스님의 참모습 이시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취하여 꽃밭 속에 누웠도다

 

스승 경허의 전 생애를 아주 간략하게 두 줄의 글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살 때는 온몸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살다가 죽을 때는

철저하도록 자신의 흔적을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금선대에 걸려 있는 경허스님의 제자 만공스님 초상

 

만공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서

<七仙女臥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일화가 있다

어떻게 들으면 세간 사람들에게 공연한 오해의 소지를 살 수 있는 일화이지만

만공은 법도를 뛰어넘어 거침없이 무애자제 했다는 호기 때문에 존경받았던 분이기도 하다

만공이 입적을 할 당시 저녁밥을 맛있게 들고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독백하기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 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했네"

하고는 요를 펴고 누워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 아니할 수 없다   

 

만공스님은 1871년 전북 태인에서 태어나 8.15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이곳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14세 때인 1885년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서산 천장사에서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덕숭산 자락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은 멸종되어 가던 조선시대의 선맥을 끝까지 지켜온

당대의 선승 경허와 만공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금선대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본 덕숭산 골짜기 풍경

 

만공선사가 깨달음을 펼치며 사자후를 토했던 덕숭산 금선대에서 바라본 산하대지

이곳이 바로 만공스님이 8.15 해방 그 이듬해까지 수도 하다 입적한 곳이라고 한다  

그때 만공스님의 세수 75세 법랍 62년이었다

13세 때 공주 동학사에서 처음 출가하여 이곳에서 약 40여 년간 보냈으니까

60년 수도 생활 중 거의 반평생 이상을 이곳 수덕사 능인선원(정혜사)에서 보낸 셈이다

 

경허선사의 맏상좌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 사람이고 만공스님은 전북 정읍 태인 사람인데

13세 때 부친이 돌아 가시자 어머니가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

어머니를 따라 공주 동학사로 출가한 만공스님은 소년시절부터 참선에 정진했고

1900년 경 30세 되던 해 이곳에 정혜사(수덕사 선원)의 선원장이 되어 수많은 납자들을 배출했다

 

드넓게 펼쳐진 내포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덕숭산인지라

아침에 저 동쪽 들판에서 해 뜨는 모습과 서쪽으로 해 지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고

멀리 산골짜기 사이로 홍성읍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깊은 산속에서 속세의 모든 움직임들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세속의 환영과 같은 모습을 멀리서 훤히 내려다볼 수가 있었으니

물 위의 거품과 같고 들판 위에 아지랑이 같이 일어났다 꺼지는

세속의 모습들이 매일같이 눈에 보였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