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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뿔 쥐뿔

퇴계 이황, 19세 두향과 사랑행각? 충주호 장회나루 유람선 옥순봉, 구담봉

by 비단왕 2024. 6. 8.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21년 5월 9일, 촬영된 사진들임을 알려드립니다 

 

천안에서 동해시 북평으로 가다가 잠시 들려본 단양 장회나루 

천안에서 평택 - 제천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충주 IC로 빠져나와

충주호 남한강을 따라가다 단양 장회나루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여기는 단양 장회나루 

내가 90~2000년 대 자주 다니던 코스다 

당시 단양 장회나루는 나의 쉼터이자 한숨 자고 가는 곳이기도 했었다 

충주 무학시장에서 단양 상설시장으로 갈 때 늘 쉬어가는 곳, 단양 장회나루,,,

당시는 이 휴게소 건물이 없었다 

나루터와 널은 공터만 있었는데 어느새 휴게소가 지어지고 음식점도 많이 늘어난 것 같다 

90년 대, 당시는 여기서 남한강 장회나루가 훤히 내려다 보였고 참으로 고즈넉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와보니 많이 어수선해진 것 같다 

 

90년 대, 나의 쉼터였던 장회나루 유람선 주차장은 많이 번화돼 있었다 

90년 대에는 여기에 아무런 건물도 없었고 커다란 공터만 휑하니 있었는데,,,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선착장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선착장 매표소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선착장 매표소

 

장회나루 단양군 관광안내도

 

장회나루 월악산 국립공원 안내도

 

단양 장회나루 휴게소

 

단양 장회나루 배 타는 곳

 

단양 장회나루에서 바라본 구담봉 - 사진 중앙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배 타는 곳

 

단양 장회나루에서 바라본 남한강

 

그런데 단양 장회나루 선착장에 이건 또 뭣꼬? 

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년 ~ 1570년)의 신분을 뛰어넘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만나다? 

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퇴계 이황이라면 연산군 때 안동 예안에서 태어나 선조 때까지 살다 간 인물 아닌가? 

 

연산군 친엄마 폐비 윤 씨 사건으로 나라가 개판으로 돌아가던 때부터 

박원종의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고 곧 거기서 사망,,,

그 후 중종이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으로 즉위했으나 왕권은 이때부터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고

외척들이 득세, 조정은 드디어 당파싸움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고 

중중이 후사가 없이 죽자 인종이 29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8개 후, 병사로 사망, 

갑작스러운 인종의 죽음에 12세의 명종이 왕으로 등극,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 

문정왕후는 소윤파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키며 대윤파들을 모두 몰아내고

모든 권력은 드디어 소윤파가 장악, 소윤파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도적 임꺽정이 출현하는 등, 조선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 후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출신이 아닌 후궁 소생 출신인 선조가 등극,  

선조 등극 후, 조선은 외척들의 당파 싸움이 한층 더 가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퇴계 이황은 바로 이판 사판 공사판 같은 어지러운 시기를 살다 간 사람이다 

그런데 퇴계 이황은 외척들이 개판 치는 이 어지러운 시기에

스스로 자처하여 단양으로 낙향, 군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두향이란 19세 두향이란 관기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놀음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왕권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지.

여기저기서 외척들이 들고일어나 서로 물고 물리는 진흙탕 싸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자

그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스스로 단양 군수직을 자처,

단양으로 낙향하여 19세 두향이란 관기를 만나 사랑놀음에 빠질 수도 있는 거지 

당시 퇴계 이황이 48세였다고 하니 더 늙기 전에 세기의 사랑놀음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 어쩌면 퇴계 이황은 19세 두향이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 지역 호사가들이 이런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지도 모른다 

한민족은 이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에 열광하고 있으니까,,,

 

단양 장회나루에 조성된 퇴계 이황과 단양 관기 두향

 

1548년이던가? 

사서삼경이나 줄줄 외던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은

명종의 허락을 받아 단양 군수로 부임했다 

1501년 안동 예안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였다나? 

당시 퇴계 이황은 아들의 죽음에 큰 고통을 인내하던 시기였다는데 

바로 이 시기에 단양 군수로 부임하여 두향이라는 19세 관기를 만났다고 전한다 

 

시와 서예, 거문고에 능했던 19세 두향은 퇴계 이황이란 인물 됨에 반해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퇴계 이황의 10개월 재임하던 시기,

시와 거문고 선율을 나누며 사랑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고 하는데 10개월 후, 

퇴계 이황의 형인 충청감사로 재수되며

퇴계 이황도 충청도 단양에서 경상도 풍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한 집안에서 같은 도의 관찰사나 감사로 제수되면

한 사람은 다른 도로 제수 되어야 했다 

그래서 두향은 매화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황에게 매화분을 선물했다나? 

그리고 신관 사또에게 퇴계 이황을 위해 수절할 수 있도록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나? 

그리고 단양의 남한강 강기슭에 초막을 짓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냈다나? 어쨌다나? 

 

그렇게 이별 후 두향은 퇴계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20년 세월이 흐른 1570년 

퇴계 이황이 70세 되던 해, 퇴계의 죽음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소백산 죽령을 넘어 가까스로 찾아간 경북 안동,,,

두향은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먼발치서 퇴계와 이승에서의 작별 인사를 올리고 왔다나? 

그리고 단양 남한강 푸른 물로 투신. 이승에서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두향의 삶은 조선시대 문헌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두향이란 이름은 90년대 초에 쓰인 조선 후기 시 몇 편에 등장한다 

단양의 이름난 기생 두향이 죽기 직전 강선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인데 

퇴계 이황과 관련된 내용은 어떤 곳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두향의 생물 연대조차 밝혀진 바가 없어

두향이 과연 이황과 동시대를 살았는지 조차 확인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장회나루 공원에 2억 원의 돈을 들여 동상까지 세웠을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데,,,? 

 

1545년 조선 명종 때 소윤파들이 명종의 엄마 문정왕후와 손잡고 조정을 장악하여

대윤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 

이때 한양에 있던 퇴계도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었던 상황, 결국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했다 

그래서 결국 단양 군수를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쫓겨가 듯, 조정을 떠난 이황은 단양에 부임한 후에도 계속 조정의 감시를 받았다 

부임한 다음 달 둘째 아들이 죽었고 정실인 권 씨 부인은 이황이 단양으로 부임하기 전 별세,  

하지만 지방에서 벼슬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즉실 부인이 있었다 

단양의 호사가들이 이야기하는 내용과는 달리 당시 이황은 홀몸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황은 두향이를 만나지도 알지도 못했던 인물인지 모른다 

 

2억 원을 들여 조성한 단양 장회나루 공원과 퇴계 이황과 두향 동상

 

단양 장회나루에 공원에는 퇴계 이황과 두향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나루터 건너편 강기슭에는 두향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제천 천등산 박달재 정상에 세워진 박달재와 금붕이의 동상과

산기슭 금붕이 가묘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일까? 

여하튼 대한민국 관광지는 가는 곳마다 전설의 고향이 되어 있는 듯했다  

 

단양 장회나루 공원

 

단양 장회나루 앞, 남한강

 

단양 장회나루 공원에서 바라본 구담봉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선착장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선착장에서 바라본 구담봉 - 사진 왼쪽

 

단양 장회나루 유람선 선착장에서 바라본 구담봉

 

사진 왼쪽에 보이는 암봉이 단양 팔경 중 하나인 구담봉이다 

저 구담봉을 돌아가면 바로 옥순봉이 나온다 

그리고 유람선 선착장 강 건너편으로는 두향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1545년 두향이 있었던 단양의 관아는 어디에 있었을까? 

추측을 해 보면 구단양 이었던 단성면에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은 물속에 잠겼지만 충주댐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단양 군청이 있던 소재지였다 

여기서 단성면사무소까지는 대략 8Km의 거리에 있다 

아마 그곳이 1545년 신관 사또 퇴계 이황이 머물던 단양 관아였지 않았을까? 

 

물론 퇴계 이황도 500년 전 이 광경을 보았을 것이고 관기 두향도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근거를 가지고 퇴계 이황과 19세 두향이 여기서 사랑 행각을 벌였다는 건지,,,

당시(조선 명종 때) 조정에서는 서슬이 시퍼런 을사사화란 난이 벌이지고 있었는데 

과연 퇴계 이황이 여기서 19세 두향과 사랑행각을 벌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