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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경, 07~17년 이야기

백발가를 부르자! 단양 사인암 역동 우탁 백발가, 청련암 나옹화상 창건?

by 비단왕 2024. 5. 5.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2009년 11월에 촬영된 사진들입니다 

어느 카페에서 스크랩 해간 날짜를 보니 2010년 06월 04일이었는데요 

다시 복원한 포스팅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단양 대강면 사인암 마을 - 2009년 11월 촬영

 

사인암 마을을 가로지르는 조동천(운선구곡) 2009년 11월 활영

 

단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사인암은 멀리서 보면 기세 좋게 쭉 뻗은 모양이 아주 경쾌하게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암석들이 벽돌을 쌓아 올린 것처럼 겹쳐져 있어 

누군가 거대한 성벽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절벽 꼭대기에는 괴괴한 소나무들이 암벽사이로 뿌리를 내려 

마치 분재 소나무를 보는 듯하고 암벽의 높이는 대략 40~~50m쯤 된다 

 

사인암 마을 - 단양군 대강면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조동천을 따라 약 10분 정도 들어오다 보면 

가을 정취에 흠뻑 젖은 사인암 마을이 그 고즈넉한 모습을 드러낸다 

늦가을의 사인암 마을은 음식점 마을 슈퍼,

마을 주점 등이 모두 문을 닫은 채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있다 

단풍철에 단풍놀이를 왔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흔적 또한 오리무중이었고 

어디선가 느닷없이 뛰쳐나온 검은 개쉐이 한 마리만이 제 세상 만난 듯 

고즈넉한 마을을 환장하게 싸돌아 다니고 있다 

그래! 

오늘은 이 을씨년스러운 계절에 역동 우탁 선생이 은거하며

사인암에 남겨놓은 을씨년스러운 흔적을 찾아

나도 한번 그 을씨년스러운 정취에 흠뻑 취해보자 

 

사인암 마을 동네 슈퍼

 

단양 사인암 마을의 식당겸 매점, 민박

 

사인암 마을을 가로 지르는 조동천(운선구곡)

 

사인암 마을앞을 흐르는 조동천(운선구곡)

 

단양 IC에서 사인암으로 들어오는 도로변에는 남조천이란 푯말이 세워져 있었던데 

두울마을 지나 사인암에 들어오면 갑자기 개천의 이름은 조동천(운선구곡)으로 바뀐다 

사인암 마을을 흐르는 개천은 조동천(운선구곡)이고 

조동천이 사인암 마을을 벗어나면 남조천이 되는 것일까?

 

사인암 마을을 가로 지르는 조동천(운선구곡)

 

사인암 마을은 개천변에 널찍한 바위가 많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바위에는 수많은 시인들과 묵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장기판과 순장 바둑판도 바위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7백 년 정의 역동 우탁 선생이 "장군 받아라!" 하면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사인암 절벽 뒤에 있는 청련암

 

우뚝 솟은 사인암과 청련암 대웅전

 

사인암의 거대한 절벽 뒤로는 청련암이라고 하는 작은 암자가 은밀하게 숨어 있는데 

저 암자는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옹화상도 7백여 년 전 창건한 절이 꽤 많은 것 같다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에도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청룡사라는 절집이 있는데 

언제 또 500리나 되는 길을 걸어와서 여기다 저 청련암을 창건했을까? 

경기도 안성에서 단양 사인암까지 걸어오려면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온다 해도 

일주일은 꼬박 걸렸을 텐데,,

 

사람이 한 시간에 4Km씩 8시간 꼬박 걷는다고 하면 30Km,, 그렇게 7일 꼬박 걸어야 200Km다 

안성에서 단양 사인암까지 지금 현재의 도로를 타고 오려면 200Km는 와야 한다 

더구나 역동 우탁선행이 있었던 고려말에는 수도가 황해도 개경이었으니까 

개경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안성에서 오는 것보다 곱절의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먼 길을 넘나들며 오갔던 사람들은

그들만이 알고 있었던 지름길이라도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진짜로 축지법을 쓰면서 넘아들었을까? 

 

나옹화상이 창건 했다는 청련암 안내문판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찰을 창건한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신라의 의상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은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를 비롯,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경북 영주의 부석사, 등,,,

그 숫자를 헤아려보면 대략 일백여 개는 족히 될 듯싶다 

일백여 개의 절을 창건하려면 강원도 양양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한 달은 꼬박 걸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절은 동네사람들이 창건하고 의상은 도장만 팍팍 찍어 주었던 것이었을까? 

 

칠백여 년 당시 사인벼슬(임금을 보좌하는 직책)을 하던 우탁 선생이 낙향하여 이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하여 이 먼 길을 오고 갔을까? 

 

사인암 - 단양군 대강면

 

단양 사인암! 

사인암은 고려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 년 전,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란 사람이(세간에서는 선생이라 칭함) 사인 벼슬을 가지고 있을 당시 

이곳에 머물면서 바위에 시를 새겼다고 한다 

사인(舍人)은 고려시대 정 4품에 해당하는 벼슬이었으며 임금을 보좌하던 직책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유명한 시, 한편 여기 옮겨본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늙는 것을 두려워했나 보다 

그러니까 이런 백발가라는 글이나 쓰는 거지 

 

이 시는 젊은 시절 많이 읊조렸는데 우탁의 백발가라는 것은

사인암을 자주 드나들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참 그럴듯한 문장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늙은이의 넋두리 같아 보인다 

하긴, 이 시가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을 보면 고려의 국운이 한창 기울어지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모든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여 이런 넋두리 비슷한 시들이 나올 법도 했다 

당시 역동 우탁선생은 안동, 예안 등을 전전하며 말년을 보냈다 하고 80세를 살았다고 하니

그때 기준으로 본다면 오지게도 장수를 하신 분이다 

이같이 사인암에는 역동 우탁이란 사람을 기려 바위 이름을 사인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또 바위에 새겨져 있는 우탁의 친필시 한수 옮겨 본다 

卓爾不群(탁이불군)

確乎不拔(확호불발)

獨立不懼(독립불구)

遯世無憫(돈세무민) 

 

우탁,,,

 

많은 중에 뛰어난 모습 

확연한 저 모양이여 

홀로 숨어 있어도 걱정 근심 없이 

사인암에 서서 세월을 낚아 보네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대체 무슨 뜻인 줄 모르겠다 

한자의 모양새도 요상하고 동시대의 고시조에 나오는 음률과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한자의 뜻을 따라 대충 번역을 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영 아닌 것 같다 

정확한 뜻을 알려면 타이머쉬인을 타고 칠백 년 전으로 되돌아 가

역동(易東) 우탁(禹倬)이란 사람을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이 단양 사인암에는 역동 우탁의 흔적이 있었기에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가

고려말 사인 벼슬을 지냈던 우탁이란 사람을 기려 바위 이름을 사인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사인암 - 단양군 대강면

 

역동(易東) 우탁(禹倬) 

그는 한창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있을 무렵인

1269~1343년을 살았던 역학의 대가이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도 우탁선생 제자의 문하생 중 하나였다고 하니 

조선시대 주역의 대가였던 퇴계 이황도 우탁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주역은 사서삼경에 나오는 삼경 중의 하나다 

사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이고 삼경은 시경, 서경, 주역인데 

그중 주역은 유교경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경서로 알려지고 있다 

우탁 선생은 단양이 고향이라 단양 쪽에 유적이 많이 있지만

안동의 예안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나중에는 퇴계 이황에 위해서 예안에 역동서원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대원군 서원 철폐령 때 철폐 되었다고 한다 

우탁 선생의 묘는 현재 안동의 예안에 있다